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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지긋지긋한 고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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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 때였다. 열 달 위 고참이 있었다. 녀석은 처음 얼마간 자기 그림자처럼 나를 데리고 다녔다. 일종의 후견인 제도로 낯선 부대생활에 신병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조언해 주는 역할을 녀석이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녀석 때문에 힘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난감한 말장난으로 나를 못살게 굴었던 장본인이 그였던 것이다.

신병인 내가 로봇처럼 걸으면 녀석은 내 옆에서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면서 가끔 이상한 화두를 던졌다. 녀석이 "참새"라고 말을 툭 던지면 나는 "짹짹" 했고, 녀석이 "병아리"라고 운을 떼면 나는 "삐약삐약" 했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독수리"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독수리가 어떻게 우는지 어찌 알겠는가. 녀석의 손이 올라오고 내 뒤통수에서는 "딱" 소리가 났다.

한번은 내무반에서 차렷 자세로 앉아 있는 나를 군홧발로 툭 차면서 녀석이 대뜸 물었다.

"야, 너 뭐야?"

나는 긴장해서, "네, 이병 김-진-규!" 라고 절도있게 관등성명을 댔다. 녀석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

"누가 네 이름 물었어? 너 뭐냐고, 임마."

나는 급한 김에, "네, 사람입니다." 대답했다.

녀석은 정말 어이없다는 듯, "누가 사람인지 몰라서 물어? 너 뭐냐고, 임마?" 다그쳐 물었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어김없이 내 뒤통수에서 "딱" 소리가 났다.

내가 신병 신분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녀석은 종종 괴상한 질문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내 뒤통수에서 아마 백 번 정도는 그 "딱" 소리가 나지 않았나 싶다. 당시엔 그런 엉뚱한 질문이나, 질문 뒤의 뒤통수 가격이나, 녀석의 장난스러운 성격이 그렇게 밉고 싫을 수 없었다. 녀석을 피해다니는 게 나의 일과의 하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탓일까? 이제 그때를 돌이켜 보면 왠지 웃음이 나온다. 그가 했던 몇몇 질문들. 어떤 질문은 하도 기상천외해서 며칠을 두고 답을 고심해 보다가 명문대 출신 신병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했다. 녀석을 만나면 이번엔 내가 묻고 싶다.

"야, 고참. 그땐 심각했는데 지금은 왜 웃음이 나오는 거냐?"

김진규(33.학생.경기도 부천시 역곡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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