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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그들은 어떻게 통일의 문을 열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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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동방정책을 추구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을 마련한 빌리 브란트(1913~92). 그의 친구이자 참모였던 저자 에곤 바르는 그를 “비전을 가진 자”로 평했다. [중앙포토]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에곤 바르 지음
박경서·오영옥 옮김
북로그컴퍼니, 272쪽, 2만원

독일분단과 동서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장벽이 붕괴한 지 어느덧 사반세기가 지났다. 25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서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에 누구보다 감회가 깊은 이가 있을 것이다. ‘동방정책(Ost Politik)의 설계자’ 에곤 바르(Egon Bahr·92)다.

 그는 소련·동구권·동독 공산정권과의 긴장완화를 위한 동방정책을 설계, 결과적으로 베를린장벽 붕괴와 이듬해인 90년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숨은 1등 공신이다. 이 정책의 ‘건축책임자’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장벽 붕괴 3년 후, 독일 통일 2년 후인 92년 타계했다.

 이 책은 ‘브란트의 비서실장’ 바르가 집필한 책이다. 브란트 탄생 100주년인 지난해 『그것은 자네가 이야기해 주게(Das musst du erzahlen:Erinnerung an Willy Brandt)』라는 제목으로 발간됐던 회고록이다. 바르의 자서전인 『나의 시대에(Zur meiner Zeit·1996)』와 마찬가지로 동방정책과 긴장완화정책을 상술하고 있다. 특히 죽음을 넘어서까지 동행하고 있는 브란트와의 만남과 우정을 되새겨보며 격동기 독일과 유럽, 그리고 세계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브란트와 바르의 운명적 만남은 도원결의를 떠올리게 한다. 히틀러 나치정권을 피해 노르웨이에 망명했던 브란트는 2차 대전 후 귀국해 사민당의 주목받는 정치가로 성장한다. 기자 출신인 바르는 기민당 아데나워 총리의 반통일적인 노선에 불만을 품던 중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브란트에 주목했다.

 바르가 56년 사민당에 입당하면서 “전쟁 이후 독일 외교정책의 시작은 여하튼 동방정책이라 칭한다”라고 연설한 대목에 브란트는 이심전심이었다. 의기투합한 브란트와 바르가 만든 작품이 바로 동방정책이었다. 할슈타인 독트린(동독 정부를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아니한다는 서독의 외교 정책)에서 탈피, 긴장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동구 공산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것이 동방정책이다. 63년 7월 투칭회의에서 선보인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erung)’는 동방정책의 핵심 철학이다.

 베를린시장-대변인, 외무장관-외무부 정책기획책임자, 총리-비서실장의 조합으로 이뤄진 브란트-바르 팀은 환상의 콤비였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역사 속의 한 인물로 남을 게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동료이자 친구 바르의 충고는 브란트에겐 큰 힘이 됐다. 브란트는 “정의롭고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무릎을 꿇는 것보다 나부끼는 깃발과 함께 침몰하는 편이 낫다”며 바르와 함께 동쪽으로의 접근을 밀어붙였다.

 닉슨 대통령이 ‘브란트의 키신저’라고 불렀던 바르는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 폴란드의 고무우카 당의장,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울브리히트, 호네커 서기장과 대담한 담판을 벌였다. 동방정책은 모스크바조약과 바르샤바조약, 베를린 통행협정, 동서독 기본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는 결국 독일통일을 넘어 냉전종식까지 가는 원동력이 됐다.

 우리는 독일 통일의 교훈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 그만큼 세계사의 일대 사건이자 우리의 통일 모델이 될 수 있는 동서독 통일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책에는 바르와 브란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랜드 디자인을 가지고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야 할 우리가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 곳곳에 있다.

 비전을 공유했던 둘은 치밀한 사전 준비와 설득력으로 무장해 협상 상대방의 문을 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했던 사민당은 물론 보수 기민·기사당의 반대도 같은 방법으로 극복해냈다. 통일보다 긴장완화가 우선 목표였지만 이 또한 점령 4개국(미·영·프·소)의 동의가 먼저란 점을 잘 파악하고 2(동·서독)+4 모델을 처음부터 효율적으로 가동한 점이 돋보인다.

 바르는 브란트가 비서 기욤의 간첩 스캔들로 물러난 이후에도 동방정책을 이어받은 같은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와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 정권에서도 동방정책 특사 역할을 수행했다. 남남갈등과 진영논리에 매몰돼 초당적 대북정책을 실행하기 어려운 한국의 정계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물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장거리미사일 발사 실험을 한 북한과 동독은 차원이 다른 파트너일 수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북한의 도발이 연일 계속되는 상황도 독일과는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바르가 “민족이 갈라지고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는 한국인의 비극을 우리는 겪지 않았다”고 쓴 것처럼 한반도의 긴장완화는 독일보다 더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르의 회고록은 우리에게 정답에 가까운 해답일 수 있다. 우리가 여러 모로 곱씹어봐야 할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브란트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브란트와 바르의 드림팀이 나타날 수 있을까.

[S BOX]바르가 본 브란트

“(독일) 본의 정치인들이 갈수록 서방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한 반면, 브란트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이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둘 중 누구도 함부로 상대방의 마음속 깊은 ‘자아’가 되려 하지 않은 데 있다.”

 “브란트는 과거를 묻어두거나 역사로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통합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브란트는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알았으며, 역사 속에서 독일 민족을 위한 자신의 비중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의식과 겸손한 자부심을 품었던 브란트는 자신의 묘비에 ‘애썼다’고 적어주기를 바랐다.”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유대인 추모비 앞에 헌화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갑작스러운 영감에 따라 무릎을 꿇은 그의 직관도 카리스마에 속한다.”

 “브란트는 나에게 정치가 사람의 성격을 못쓰게 하지는 않는다는 예를 남겨준 선량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역량을 비전 있는 정치 구상에 용해시켰다.”

 “브란트는 지령을 내렸고 언제 어디에서 내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건축주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설계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경환 기자 helmu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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