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7)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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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플라이급 이일호>
이일호는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프러모터로서도 성공한 드문 복서중의 하나다. 그는 펀치는 약했으나 스피드가 뛰어났으며 경량급선수로는 박력 있는 복싱을 구사했다.
해방 후 국내 첫 플라이급 타이틀을 따낸 이일호는 한차례 아마대회에 출전한 뒤 막바로 프로로 전향, 54년 34세로 은퇴하기까지 1백64전1백44승(13KO승)20패의 많은 전적을 남겼다.
충북 음성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소년 일호는 16세 때 고향을 떠난다.
농사를 돕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경성으로 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꼭 이틀을 걸려 청계천3가 수표동에 도착했다.
수중에 20원을 지참한 그는 여인숙(하루 5전)에서 이틀동안 머무르다 영등포의 약공장에 공원으로 취직을 했다. 이 일본인 공장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같은 또래의 나기찬이란 동료가 매일 하오 3시만 되면 보따리 하나를 들고 퇴근을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이일호는 그가 사람을 때리는 권투라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결국 그도 한국인지배인의 허가를 받고 도장에 나가게 됐다. 수표동에 있는 이 도장이 황을수가 관장으로 있는 동양권투구락부다.
노병렬 사범으로부터 6개월간 지도를 받은 그는 이듬해(1937년) 봄 전국아마권투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대회는 현 조선일보자리에 있던 극장에서 벌어졌는데 플라이급으로 나간 그는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랐다. 그런데 결승전의 상대는 묘하게도 1년 먼저 시작한 동료 나기찬이었다.
이일호는 빠른 발을 구사하여 동료 나기찬을 누르고 선수권을 따냈다. 며칠 후 황 관장은 이일호를 사무실로 불러 『너는 몸도 빠르고 자질이 있으니 프로선수를 해봐라』고 권유했다. 그가 프로가 무어냐고 물으니까 『프로는 셔츠를 입고 4회전을 뛰는 것이다』라는 것이 황 관장의 설명이었다.
당시 아마는 셔츠를 안입고 경기를 한 반면 프로는 이같이 셔츠를 작용하는 것으로 구분됐었다. 프로로 전향한 그는 1년에 두 서녀 차례 대전을 가졌는데 42년10월 동경에서 벌어진 전조선-전일본 대항전에 출전하면서 선수생활의 화려한 꽃을 피웠다. 이 원정에는 이상록(미들급) 정복수(웰터급) 김진용(라이트급) 양정모(밴텀급), 그리고 이백호(플라이급)가 출전했다. 이일호의 상대는 일본챔피언인 키가 큰 「스즈끼」로 인기가 좋은 복서였다. 김진용·이상록이 모두 패한 뒤 세 번째 출전한 이일호는 책임이 무거웠으나 초반부터 고전, 3회전에선 스트레이트를 맞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야외경기장의 2만여관중의 환호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순간 공이 울려 기적적으로 KO를 면했다고 이일호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코너로 기어 들어온 그는 세컨을 보던 이상묵과 황을수에게 경기를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했으나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때 두 선배가 『이 사람아! 저 일본인들의 함성소리가 안들려』라고 호통치던 소리는 이후 평생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이일호는 회상하고 있다.
호통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아침에 먹은 밥을 그대로 토하고 말았다. 토하고 나자 그는 속이 시원해 다시 힘이 솟아 4회부터 8회까지 결사적으로 밀고 들어가 결국 극적인 판정승을 거뒀다. 대전이 끝난 뒤 이일호의 인기가 어찌나 좋았는지 목욕탕까지 일본인 여자들이 따라와 사인을 해달라며 법석을 떨었다.
이일호는 해방 후 내가 관여하던 서울권투구락부(관장 김명석)에 소속, 47년에는 첫 국내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다. 49년 봄 어느날 김 관장이 이일호를 불러 밴텀급 강자인 고봉아와 대결할 것을 지시했다. 주위에선 모두 이일호를 말렸으나 그는 선뜻 대전에 계약을 했다.
그는 대전이 확정된 뒤 도장 2층에서 합숙을 하며 보름동안 맹훈련을 거듭했다.
경기는 현 국립의료원자리의 빈터에서 열렸는데 일찍 결혼한 그의 부인은 7세된 큰 딸을 데리고 링사이드에서 관전했다.
그러나 권투는 예상이 빗나가는 일이 많아 관중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었다.
이일호는 고봉아를 맞아 시종 치고 빠지는 등 완전히 우세하게 이끌었다. 고의 세컨인 정복수 서재석은 링을 두드리며 아우성을 치는 등 이의 승리는 명백했다. 그러나 저지페이퍼를 집어든 박용만 주심은 두 선수의 손을 쳐들어 무승부를 선언하고 말았다.
이일호가 링을 내려오자 김명석 관장은 링으로 뛰어올라가 주심의 멱살을 잡고 구타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본부석에서 저지페이퍼를 다시 검토한 결과 이의 3-0 판정승이 발견돼 다시 정정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대전은 이후 무승부로 복싱사에 남고 말았다. 박 주심은 후에 체급도 다른 경기이고 당시 줏가를 높이던 고봉아의 장래를 위해 무승부로 스스로 결정했다고 엉뚱한 변명을 했다. 이 사건으로 박용만은 권투계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6·25 사변이 일어난 뒤 이일호는 부산으로 피난, 선수 겸 프러모터로 활약하면서 제2의 권투인생을 개척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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