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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로버트·올리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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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로버트·T·올리버」-.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외교』의 주역으로 반평생을 한국을 위해 산 인물이다.
미국 서해안의 최남단 항구도시이자 미국 최대의 해군항인 샌디에이고 시의 교외 숲 속에 자리한 한 15층 짜리 아파트로「올리버」박사를 찾았을 때 기자는 그의 일생에 있어 한국 특히 이승만이란 인물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40여 평 남짓의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대통령의 대통령시절 집무하던 모습을 찍은 대형 사진이었다. 그 밑에 지금은 단 2개밖에 남지 않은 이대통령의 석고 두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애장하고 있는 물건 거의가 『프레지던트 리와 관계된 것』들이었다.

<"부자와 같은 사이">
올해 73세로 지난 70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정년퇴직, 부인「마거리트」 여사와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는 「올리버」박사는 지금도 우리민요『아리랑』의 가락을 기억하고 있었다.
『후손들에게 한국의 「조지·워싱턴」(이승만)을 도와 한국에 독립정부를 세우도록 한 「라파예트」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는 「올리버」박사는 『정치가로서의 이승만은 애국심과 설득력을 갖춘 신념의 사람으로, 그의「고집」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신념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전공인 스피치에 관한 책보다 한국에 관한 저술이 더 많은「올리버」 박사는 54년에 쓴 이승만의 전기 『이승만 전설 속의 인간』을 비롯, 한국의 정치·문화·역사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가지고 있는데, 기자를 보자 지난 78년 집필한 『이승만과 미국의 대한정책 1942∼60』을 꺼내 보여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올리버」가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은 194l년 10월. 오리건주 출신으로 위스콘신대에서 스피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루이스버그에 있는 버크널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전쟁 중 워싱턴DC에 와서 전시 식량국에 근무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68세의 노인.「올리버」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그것이었다. 「올리버」를 이승만에게 소개한 사람은「에드워드·전킨」목사. 한국에서 선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전킨」목사는 젊은 「올리버」에게 「한국의 위대한 정치가」이승만을 소개했다.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이승만은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또 고집불통의 철저한 반일주의자로서 특히 그의 저서 『저팬·인사이드·아우트』가 잘 알려져 있었다.
첫 대면에서 이승만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르듯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일제에 의한 한국지배의 참상, 그리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차근차근히 설명해줬다.
「올리버」는 그의 풍부한 지식과 확고한 신념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것이 「올리버」로 하여금 이승만의 사업 특히 선전활동을 적극 돕게 한 계기가 됐다.
해방을 맞아 이승만이 미국을 떠날 때 자신의 대미 외교창구 격인 외교위원부를 그대로 유지, 그 책임을 자신의 충실한 부하인 임병직에게 맡겼다. 그리고 종전 후 시라큐스대에서 교편을 잡게된「올리버」에게도 자신의 사업을 도와줄 것을 각별히 부탁했다.
「올리버」는 임병직과 함께 워싱턴의 교위원부의 핵심 멤버로서 활동, 46년 2월 이승만이 민주의원의장으로 선출되고서는 그의 개인 고문으로 한국에 와 이승만을 도왔다. 「올리버」의 주요활동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대미 로비활동이었다.
46년 6월 민주의원의장 이승만이 지방여행 중 전북 정읍에 들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정국에 파문을 일으켰다.
정읍 발언이후 이승만과 미군정과는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시작된 지 겨우 5개월만으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미군정의 정책에 정면 도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미군정은 이승만을 가장 반미적인 인물로 지목, 그의 활동에 갖가지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신왕래, 케이블, 전화내용까지 일일이 통제했다.

<미군정 방해 꺾어>
당시 한국문제 처리에 대해 국제적으로 합의된 사항은 43년 카이로선언과 45년 모스크바 삼상협의 결정 뿐. 원칙에 충실했던 주한 미 점령군 사령관「하지」장군은 본국 정부로부터 그 이상 어떤 지침도 받은 것이 없었으며, 그 자신 진보적 자유민주주의를 신봉,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의 견제로 정치적 장래가 어둡게 보이던 이승만은 46년 12월 미군정 측의 방해를 물리치고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도착 즉시 이승만은 그의 친구들과 전략 참모회의를 열고 대처방안을 모색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변호사 「존·스태거」, INS(UPI전신) 기자 「J·제럼·월리엄즈」, OSS의「프레스턴·굿펠러」대령, 상원의원「프레더릭·해리슨 목사, 「올리버」, 임병직, 임영신 등. 이들은『분단된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남한만이라도 임시장부가 서야 한다』는 내용의 6개 결의안을 채택, 미국무성에 제출했다.
소위「이승만의 워싱턴 로비」불렸던 이 모임은 그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올리버」는 이승만 자신, 임병직과 함께 「이승만 워싱턴 로비의 3인」중 한사람으로서 미국 내 각종신문·잡지·학술지 등에 이승만의 주장을 옹호하고「하지」의 무능을 공격하는 글들을 정력적으로 발표, 미국 내 여론을 이승만 쪽으로 몰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는 「올리버」의 이 같은 행동에 몹시 분개,『「올리버」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까지 극언했으며, 『워싱턴 로비를 위해 거액의 정치자금이 이승만에 의해 뿌려지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대해「올리버」박사는 지금도 이를 근거 없는 것이라고 부인한다. 『그 당시 우리의 활동비는 연 2만 달러 정도가 고작으로, 이 돈으로는 사무실 임대료·홍보자료 제작비·인건비조차 부족, 고통을 받았다』고 기자에게 술회했다.
시간은 이승만을 도왔다. 전쟁 중 우호관계에 있던 미소 양국은 전후문제 처리과정에서 서서히 대림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47년 방미 중이던 「윈스턴·처칠」의 「철의 장막」발언, 이어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공산침략을 막기 위한 「트루먼·독트린」발표로 미소간 냉전이 시작되면서, 이승만의 단정론이 먹혀 들어갔다.

<공로훈장 받아>
47년 12월 제3차 미소공위가 실패하고 이어서 한국문제가 UN에 상정, UN 한국임시위원단이 창설됐고 『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한국 내 전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하는 UN결의가 채택되면서 이승만의 승리는 확실해졌다.
48년 8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 「올리버」는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다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승만의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한국정부에서 주관하는 『코리언·퍼시픽·프레스』를 맡아, 월간 『코리언·서베이』지의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올리버」가 이승만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59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의 84회생일 때. 당시 이대통령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한 그는 경무대에서 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때 이대통령과 함께 경무대 안을 거닐 기회가 있어, 이 자리를 빌어 이기붕이 한국민 사이에서 명망이 없을 뿐 아니라 건강도 나쁨을(특히 그의 하반신마비)들어 후계자로서 부적함을 얘기하자, 이 대통령은 『「프랭클린·루스벨트」도 소아마비를 앓지 않았던가?』하고 반문하는 바람에 입을 닫고 말았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 후 4·19가 일어나 이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했을 때, 「올리버」는「프란체스카」앞으로 방문의사를 밝혔으나 『그의 병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답장만 받았다.「올리버」이후에도 신생 대한민국과 미국사이엔 수많은 주역들이 명멸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 한미관계는 또 다른 전환기를 맞고 있다. 8·15 이후의 주역들은 다음기회로 미룬다.<끝>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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