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 논란' 휩싸인 국제전시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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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유학자 유묵 특별전’에 나온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김종직(1431~92)의 글씨는 15세기가 아닌 19세기 글씨체라 한눈에 위작임을 알 수 있다. 편지지 여백에 둘러쓰기도 160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다.

가짜로 의심되는 작품이 상당수 포함된 전시회가 공공미술관에서 열려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의 전시는 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한 '조선유학자 유묵 특별전'. 당초 서예계는 출품작의 진위가 확실하지 않으니 사전에 검증 절차를 거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서울시의회 의원과 정치권 인사가 이번 전시 조직위원회에 대거 자문위원으로 참가한 뒤 검증 없이 전시가 강행됐다. 결과는 국제적인 망신으로 이어지게 됐다.

'조선 유학자 유묵 특별전'은 서울시와 서울시의회가 후원하고 한국서예포럼이 주관하는 제1회 서울서예비엔날레 행사의 하나로 마련됐다. 개인 소장가 박모씨가 30여 년 모아온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 유학자 127명의 편짓글과 서첩 등 200여 점을 전시 중이다.

그러나 개막일부터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관람객 의견이 쏟아졌다. 한국이 중심이 돼 중국.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서예가와 전각가에다 미국과 유럽의 필묵가까지 참여하는 국제전이라 파장이 커졌다.

서지학자와 고서 전문가는 출품작이 위작인 까닭을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한 사람의 글씨체가 달라진 경우다. 본문 글씨와 이름을 쓴 글씨가 다르고 편지마다 서체가 바뀐다. 후에 다른 사람(위조꾼)이 이름을 써넣었기 때문이다. 영남학파 정여창의 글씨 중 하나는 납작하고 다른 하나는 길쭉하다.

둘째는 격식에 안 맞는 내용이 들어간 경우다. 사대부가 챙기던'대두법(상대방을 한 번 올려주고 한 칸 띄운 뒤 본론에 들어가는 편지 서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편지 본문에서는 집안 조카뻘이라고 썼다가 끝에 가서는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로 마무리한다. 김일손의 편지가 그 예다. 셋째는 160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나는 편지 여백 글씨가 1500년대에 이미 보이는 경우다. 세로로만 내려쓰던 편짓글이 편지지의 빈 공간을 빙 돌아가며 쓰인 때는 임진왜란 이후이기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 밖에 김종직의 1400년대 글씨나 조식의 1500년대 글씨에 19세기 글씨체가 나타난다. 원래 같이 쓰지 않는 호(號)와 자(字)를 함께 써놓은 일도 있다. 후대에 손을 대 위작을 진작으로 만든 증거가 출품작 대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영휘 '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은 "공인 감정기관이 없는 우리 실정에서는 소장자나 주최 측이 우기면 도리가 없다"고 개탄했다.

몇몇 서예계 관계자는 개인 컬렉터의 작품이 공개될 때 적절한 감정 절차가 필요하지만 자문위원단을 업은 조직위의 고집에 그냥 넘어갔다고 입을 모았다. 애초 한국서예포럼(공동대표 권창륜.김태정.변요인)은 지난해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 대관 신청을 냈으나 서예박물관 쪽은 출품작가와 작품 등을 확정하지 못하는 등 서류 미비를 들어 불허한 바 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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