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5)<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33)|일제 때의 국내 복싱계|김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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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제시대 국내 복싱계는 동경을 무대로 한 한국선수들의 활약에 비해 미약했음은 물론이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를 비롯하여 조선 권투구락부·동양 권투회·경성 권투구락부, 그리고 한남 권투회 등 서울에만 집결된 소수의 체육관을 중심으로 거의 아마추어 복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복싱의 산실격인 YMCA에서는 권중린·이구덕·박순철·송방혜·최룡덕 등이 배출되었고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조선 권투구락부에서는 이규환·김창엽·박용신·김형중·김영복·송효종·김명석·노병렬·김홍낙·박춘서·노갑성·김은성 등의 유명 복서를 길러냈다.
또 동양 권투회 출신으로는 정복준·한용하·양정모·김인태 등이 대표격이다.
29년에 YMCA주최로 제l회전 조선아마추어 권투선수권 대회라는 게 처음 열리고 29년부터는 일본의 체전인 신궁대회에 한인의 출전이 허용, 황을수 등 동경 유학생 선수들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복싱이 제법 활기를 띤 것은 3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31년 여름 조권 주최로 전국학생선수권 대회가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열리고 가을엔 조선체육회 주최로 전국아마추어 선수권대회가 창설되어 복싱 인구의 증가에 자극이 된 것이다.
더구나 그 해 12월 조권이 일본 관동지방 선발 선수를 초청, 천도교회관을 뜨겁게 달구어놓은 가운데 7대 1로 대승을 거두자 『왜놈들을 합법적으로 두들겨 패주는 것은 권투가 제일』이라는 우스개 소리와 함께 혈기에 넘치는 청소년들의 복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조권은 33년에도 와세다 대학팀을 불러들여 5대 0으로 완승했고 그 직후엔 일본을 원정, 동경 대판 명고옥 등지를 순회하여 전승을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복싱 인들은 이듬해인 34년 1월 조선 아마추어 권투연맹을 결성, 복싱계를 조직화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이 연맹의 발족직후인 4월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거행된 전 일본아마추어 복싱대회에 조선대표로 김창엽(밴텀급)·박용신(폐더급) 등 조권의 핵심멤버가 출전,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은 다음달 마닐라에서 열린 극동 선수권 대회에 나가(물론 일본대표로) 김창엽은 필리핀의 「아들나드」를 물리치고 우승, 한인 최초의 아마추어 극동선수권자가 되었으며 박용신은 필리핀의 「에르네스트」에게 석패, 준우승에 그쳤다.
이해 동경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김동준이 명동에 경성 권투구락부를 만들고 이듬해인 35년6월 황을수가 수표동에 동양 권투회를 설립, 복싱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황을수는 김정위·이상묵 등 유명체육인과 제휴하면서 당시로선 거액인 1만원을 투입했으며, 회장에 여운형씨를 추대, 장안의 관심을 끌었다.
한반도 안의 프로복싱은 이 황을수의 동양 권투회 발족과 함께 실질적인 태동을 보게 된다. 황을수는 일종의 프로모션인 조선권투연맹이란 간판을 내걸고 프로복싱의 육성과 흥행사업을 병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실적은 미미했고 국내 프로복싱의 괄목할 성행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이 즈음하여 조선프로의 대표로 뽑힌 5명이 일본에 원정, 최일과 조철은 이등용·화전양 일낭에 각각 판정패하고 심상욱과 김기환은 송강갈웅·원수춘에게 각각 3회 KO패를 당했으니 당시 한일 프로복싱계의 수준 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그래도 마지막(웰터급) 매치에서 양도윤이 소림일부를 2회 TKO로 물리쳐 전패를 모면, 다소 위안을 삼았다. 프로에 비하여 아마추어 분야에서 한 걸음 먼저 일본을 압도했다는 사실이 특기할만하다.
37년 김명석(밴텀) 홍재호(페더) 최용덕(라이트) 좌용진(웰터)이 전 일본 아마선수권대회에서 우승, 마닐라의 극동선수권대회에 출전했고, 이듬해에는 김인태(플라이) 김명석(밴텀) 정복수(페더) 강인석(라이트) 최룡덕(웰터)등이 전 체급을 석권, 일본 아마추어 복싱을 몰락시켜 놓았다.
40년에도 양정모(페더) 강인석(라이트) 문춘성(웰터) 등이 아마추어 선수권 자였다. 40년부터 프로복싱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 황을수·이상묵의 동양 권투회는 정면과·김명석·심상욱을 프로로 전향시켜 동경무대로 진출시켰고, 41년에는 김진용. 김강용·백연길·양정모·한익수로 진용을 짜 동경에 원정, 그곳을 주름잡고 있던 정복수·박용신·해동맹 등과 대전을 벌여 한인프로복서들이 독무대를 이루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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