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텃밭' 러시아 가전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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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지난해 한국은 러시아에 3억3000만달러어치의 가전제품을 수출했다. 그런데 러시아 인접 국가인 핀란드에 수출한 가전제품은 15억2000만달러어치에 달했다. 인구 1억5000만명의 러시아 시장에 대한 수출 규모가 인구 500만명 정도인 대 핀란드 수출액의 22%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업체들이 '역외 수출'이라고 불리는 간접 수출 방식을 이용해 러시아 시장을 공략한 결과다. 한국 가전업체들은 러시아의 불투명한 통관 절차와 높은 수입 관세율(가전의 경우 평균 15%) 때문에 핀란드.독일.네덜란드 등 주변 국가들을 통해 러시아 시장을 뚫는다. 러시아 대형 도매상들은 인근 국가에 수출된 한국 가전을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음성적 방식으로 러시아로 들여가기 때문에 한국 업체들로서는 관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러시아 경제 전문가는 "러시아 가전 시장에 시판되는 가전제품의 40~50%가 이런 방식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출 방식으로 러시아 시장을 뚫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지적이 나왔다. LG경제연구원의 러시아 담당 책임연구원 오영일 박사는 10일 '성장기 러시아 가전시장의 변화와 기업의 대응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현재와 같은 러시아 수출 방식에 안주했다가는 급성장하고 있는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 가전이 설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앞둔 러시아가 관세 투명화 정책을 펼치고 있어 이런 '편법 수출'이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여기에 해외 경쟁업체들이 러시아 안에 현지 생산체제를 구축해 이런 우회수출의 제도를 비난하고 있는 것도 한국업체로서는 불리한 변수다.

현재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가전의 인기는 아주 높다. LG전자와 삼성전자가 러시아 가전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두 회사의 제품은 매년 국민브랜드로 선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외국 브랜드의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매년 60~80%를 기록하던 한국 가전제품의 매출 성장세는 지난해 40%대로 꺾였다.

한계에 다다른 '우회 수출'의 대안으로는 '현지투자 확대'가 거론되고 있다. 이미 이탈리아의 메를로니가 지난해 모스크바 인근에 세탁기 공장을 세운 것을 비롯해 스웨덴의 일렉트로룩스, 터키의 베스텔, 독일의 지멘스 등이 백색가전 공장을 이미 지었거나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가전업체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4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제대로 된 현지법인을 갖추지 못했다. 현지업체에 통관 및 유통을 맡겼기 때문에 지사 형태만으로도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LG전자가 모스크바 인근에 TV.세탁기.냉장고 생산을 위한 가전 공장 건설을 시작했을 뿐이다. 오 박사는 "급성장하고 있는 러시아 시장을 해외 경쟁업체에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현지 법인 체제를 갖추고 브랜드 차별화에 적극 나서는 등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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