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청바지 강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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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9년 2월 10일. 이탈리아 대법원이 ‘청바지 입은 여성은 강간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평결을 내리고 청바지 입은 여성을 강간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여성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벗기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란다. 죽기까지 저항할 것인지, 살기 위해 벗기는 걸 도울 것인지. ‘죽기 아님 강간당하기’ 선택은 둘뿐이다. 살기 위해 저항을 포기했어도 그녀는 ‘강간이 아닌 합의하에 이뤄진 성행위’를 한 셈이다.

 지난달 25일 이란에서는 강간하려는 남자를 칼로 찔렀다고 여자가 사형을 당했다. 15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직도 ‘죽기 아님 강간당하기’였다.

 내가 만약 강간범이든 도둑이든 마주친다면? 주먹으로 위협하는 그를 향해 주위에 있는 빨래 건조대든 벗어놓은 하이힐이든 손에 들고 죽도록 패줬을 거다. 그가 폭력을 멈췄는지, 나보다 더 맞았는지, 전치 몇 주쯤 나오게 맞았는지 따질 겨를 없이 말이다. 때리는 걸 멈추면 혹시 주머니에서 흉기라도 꺼낼까봐 무서우니 그가 나보다 더 맞았을 거라는, 멈춰도 내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눈을 감고 미친 듯이 말이다.

 엊그제 ‘도둑 뇌사사건’을 통해 정당방위에도 요건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해자보다 더 심한 폭력도, 위험한 물건 사용도, 상대의 폭력이 그친 다음의 폭력도, 전치 3주 이상의 상해를 입혀도, 상대의 피해가 본인보다 심해도 다 정당방위가 아니란다. 우선 살기 위해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들고 그를 두들겨 패줬을 내 경우에는 영락없이 ‘철창행’일 게다.

 총기 소지가 가능한 미국에서는 무단 가택 침입자든 경찰이 차를 세웠을 때 맘대로 차 밖으로 나온 운전자에게든 집주인이나 경찰이나 그들에게 총을 쏴도 정당방위다. 그들이 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그럴 수 없다. 길거리에서 운전자와 경찰이 치고받고 싸우는 웃지 못할 광경도 그래서 가능한 거다.

 그런데 닫힌 공간에 둘만 있는 경우는 다르다. 총만 무기가 아니다. 흔한 칼도 있다. 무단 침입한 도둑과 마주쳤을 때 그의 주머니에 칼이 있나 없나 뒤져보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번 도둑 뇌사사건의 피해자가 좀 과하게 대응했다 하더라도 ‘도둑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서 그의 대응은 정당방위로 봐야 한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의자의 재생산을 막기 위해 정당방위의 폭은 좀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범죄 예방 차원에서 말이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