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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미도' 제작 현장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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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현장인 실미도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봉합이 안된 역사의 상처는 여전히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냈다.

청명한 하늘과 서해안 잔물결은 실미도를 위로하는 듯 했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깊게 남아 있었다.

"북파 공작원은 말 그대로 개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살인범 같은 흉악범이 공작원으로 뽑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건 전혀 사실과 달라요. 사고가 터져도 '끽' 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무지렁이만 속아서 끌려왔지요. 실미도 훈련병은 지상 목표였던 북한에도 한번 들어가지 못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 북파공작 훈련병 실화

북파 공작원의 모임인 설악동지회의 구홍회 대외협력국장은 이렇게 옛일을 회상하며 영화로 제작되는 '실미도'(감독 강우석)가 "망자에 대한 명예회복의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주문했다.

볼멘 소리는 당시 훈련병을 지휘했던 교관들에게서도 나왔다. 실미도 전우회의 이준영 사무국장은 "우리는 국가에 충성했습니다. 우리를 악마처럼 보는 시선도 있으나 그건 오해죠.

지금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갑갑합니다. 현재 국립묘지엔 열한명의 동료가 묻혀 있습니다. 영화가 우리를 매도하는 쪽으로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 순수제작비 최소 90억

강우석 감독의 어깨가 무겁다. "부담이 너무 큽니다. 실미도 관계자의 명예에 절대 금이 가지 않을 좋은 영화로 보답해야죠. 영화인으로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심정입니다"라고 간단히 각오를 밝혔다.

지난달 30일 영화 '실미도'의 제작 현장을 찾았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인근의 잠진항에서 배를 타고 20분 정도 나가니 비극의 땅 실미도가 나타났다. 야트막한 야산을 낀 백사장 주변에 10여채의 막사가 보였다.

10억원을 들인 '실미도'의 야외 세트다. 촬영장에 들어서니 살벌한 구호가 눈에 띈다. '극도로 잔인해지고 악랄해지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다''멋지게 싸우고 값지게 죽자''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 등등, 전쟁터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실미도'는 1971년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향했던 북파 공작원 훈련병 서른한명을 소재로 한 영화다. 이들은 1968년 북한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했던 일명 김신조 사건 후 만든 특수 부대에서 지옥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었다.

*** 감독·배우 "어깨 무겁다"

그러나 북파 직전에 작전이 취소되자 분에 못이긴 이들은 부대에서 뛰쳐 나왔다. 도중에 포위 공격을 받고는 일부는 수류탄으로 자폭했고, 일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의 스케일이나 사실성, 그리고 역사성 등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겠다.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기보다 각 인물을 밀접하게 그려내며 당시 사회를 드러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훈련병과 교관의 대립보다 누가 과연 이런 부대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훈련병은 왜 희생됐을까라는 문제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미도'는 순제작비가 최소 90억원에 이를 대규모 영화다. 실미도 훈련장 세트, 훈련병과 군인의 교전이 일어나는 전주 야외 세트 등 미술비에만 30억여원이 투입된다.

예컨대 평양 침투를 명령받았다가 복귀 지시를 받은 훈련병들이 돌아오는 해상 장면에만 7억원이 들어간다. 국내에선 관련 시설이 없어 잠수함 영화 'U571'을 찍었던 이탈리아의 수중 전문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계획이다.

이날 제작진은 당시 희생자를 기억하는 추모제를 열었다. 3백여명의 영화인.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육상 북파 공작원인 HID 동지회, 해상 북파 공작원인 UDU 전우회 관계자도 초청됐다.

출연배우들의 면면도 탄탄하다. '공공의 적''오아시스'의 설경구가 최고의 살인 무기로 변하는 조직폭력배 행동대장으로, 흔들림 없는 연기를 펼쳐온 중견 배우 안성기가 훈련을 책임진 교육대장으로 나온다.

또 허준호.정재영.임원희.강성진.강신일 등 연기파 배우가 포진했다. "마음이 무겁다"는 말만 되뇌는 설경구에게서 영화의 중압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달콤한 멜로 하나 없는 1백% 남성 영화인 '실미도'는 내년 설께 개봉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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