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인터넷 서신 정치' 왜 하나] "발췌·편집하는 매체론 전달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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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5일부터 연 이틀 '연정' 관련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올 들어 모두 아홉 차례의 대국민 서신을 보냈다. 지난 2월 공무원 대상 서신으로 시작해 이헌재 전 부총리 사퇴, 행정수도, 한.일관계, 당정 분리, 윤광웅 국방부 장관 해임 건의 등 굵직굵직한 쟁점 현안에 대한 입장을 대국민 서신의 형식으로 처리해 왔다.

노 대통령은 당초 미국식의 '라디오 주례 연설'을 검토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재임 12년간 30여 차례의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공황 극복 메시지 등을 얘기했던 '노변정담(fireside chat)'을 모델로 삼으려 했다. 실제 그는 2003년 7월 라디오 주례 연설을 시도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이후 인터넷 서신 정치로 전환한 것은 "루스벨트식 노변정담이 라디오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인터넷 매체의 시대"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참모들은 전했다. "말과 달리 분명하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했다는 전언이다.

대통령 후보 당시 노 대통령이 수해 복구 작업에 나섰다. 상대 후보들도 물론 다른 곳에서 작업을 했다. 신문.방송에 보도된 사진과 기사는 '한 컷'일 수밖에 없어 내용이 비슷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다른 후보와 달리 종일 복구 작업을 벌였다. 그런 자신의 장면이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장시간 방영되자 그는 "바로 이거다"라고 했다. 한 참모는 "발췌.편집하는 기존 매체의 전달 방식에 노 대통령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메시지 전부를 여과 없이 국민에게 직접 전달하는 대국민 서신의 장점을 택했던 주된 이유다. 논리적 귀결을 중시하는 변론서 작성을 주업으로 했던 그의 변호사적 특성과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서신을 쓰느라 골에 쥐가 날 정도"라고도 했다는 전언이다.

노 대통령은 관저의 데스크 톱 컴퓨터를 통해 주로 밤에 서신을 작성한다. 아침에 서신이 부속실에 건네지면 사안별로 홍보.민정.시민사회 수석과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등에게 e-메일로 보내져 가감의 의견을 듣는다. 반나절이 소요되지만 대통령의 글을 고치는 부담 때문인지 골격의 수정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한다.

e-메일 서신 활용에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초강경 대일 외교 원칙을 천명한 3월 23일 서신이다. 당시 "각박한 외교전쟁" "이번엔 뿌리를 뽑겠다"같은 강경 표현이 여과 없이 나가 청와대 내에서조차 지적이 나왔다. 다음날로 예정된 여야 지도부 회동에서 한.일 관계를 화제로 삼기 위해 서둘러 서신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외교안보의 경우 최고 지도자의 표현이 문서화되면 '엎질러진 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쟁점 현안마다 직접 의견을 개진하면 국정에 전념해야 할 대통령이 정쟁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훈 기자

"비정상적 정치 정말 속 타
바로잡기 위한 토론 필요
그래서 문제 제기하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6일 '우리 정치,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서신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재해 비정상적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공론화의 필요성을 재차 주장했다. 그는 "오랜 지역주의의 결과로 우리 정치는 가치 지향이 없는 정당 구조 위에 서 있다"며 "가치.논리의 논쟁이 아니라 감정적 대결의 정치가 되니 정치 이론도 발전하지 않고 대화.타협의 문화도 설 땅이 없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투표율과 의석 비율이 현저하게 차이 나고, 생활권이 다른 4개 군을 하나로 묶어 뽑은 1명의 국회의원을 지역대표라고 하는 비논리, 지방인구가 줄어 국회의 지방 대표권이 줄어드는 문제 등에 대한 논의가 너무 부족해 나라 장래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그는 "정치인들은 이런 비정상의 구조 위에 기득권의 성을 쌓고 문제를 외면하고, 시민사회는 모든 문제를 정치인의 도덕성 문제로 단순화하고, 학자들은 서양 정치이론에 안주해 한국 정치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닌지 정말 속이 탄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많은 문제를 내놓고 토론해야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다"며 "당장 부닥친 문제부터 사회적 논의에 올려보고자 여소야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를 잘되게 하려면 먼저 정치부터 고쳐야 한다"며 "경제에 부담 주지 않고 경제정책 챙길 것을 확실히 챙기면서 토론하고, 고치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이 경제민생 점검회의를 이해찬 총리가 주재토록 한 것을 놓고 "노 대통령이 '경제 올인'에서 '정치 올인'으로 바꿨다"고 보도한 데 대해 노 대통령은 "정말 이 언론은 그렇게 믿고 있느냐"며 "냉정을 잃으면 수준을 잃기 쉽다"고 지적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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