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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그 먼 곳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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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경복궁을 마주하고 있는 기무사 건물 앞을 오갈 때면 늘 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열꽃이 솟는 듯하다. 문화 닥터가 있다면 이 증상을 문화 아토피로 진단 내렸을 것이다. 일제시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 무차별로 파괴당한 뒤 그들에 의해 건립된 건물!

그 뒤엔 다시 군사독재의 상징인 보안사와 기무사령부로 우리 근.현대사 격동의 수레바퀴 자국이 찍혀 있는 곳이지만 그 주변은 한국 600년 역사의 큰 자락을 기적처럼 부둥켜 안고 있는 보물단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요즘 서울은 정체성 되찾기 성형수술로 바쁘다. 청계천과 경복궁 복원, 용산기지 반환 등으로 역사적 정체성의 이목구비가 제법 또렷해지고 있다. 이때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문화 정체성의 보강이다. 그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과천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 이전이다. 예전에는 가마를 타고 가서 오래 걸렸다지만 지금은 그 몇십 배 더 빠른 자동차로도 길이 막혀 과천은 여전히 멀다.

네덜란드에서 온 박물관학 교수 피터는 시내에서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50분, 10분을 기다려 미술관 셔틀버스 타고 다시 10분 걸려 도착, 두 시간여 돌아본 다음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에 와서는 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몇 년 전, 이곳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던 일본 여류 화가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관람객 때문에 전시가 끝난 뒤 역시 심한 몸과 마음의 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당연히 관람객으로 북적거려야 할 전시장은 나날이 줄어드는 관람객으로 무덤 속처럼 적요해진 지 오래다. 우리의 현대미술관처럼 도심에서 40리나 벗어난 산속에 유배당한 듯이 자리한 국립미술관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인구 4800만 명에 제 몫을 하는 미술관이 두 손가락도 채우지 못하는 실정인데 맏형 격인 현대미술관마저 불편한 위치 때문에 반수면(半睡眠) 상태에 있으니 곧 이전할 기무사 자리의 열쇠는 당연히 현대미술관이 받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와 전통의 맥박이 뛰고 있는 수도의 심장부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절묘한 접목은 더 이상 꿰맞출 수 없는 문화 걸작 탄생을 보증해준다. 게다가 창덕궁과 종묘.덕수궁 등의 고궁들, 민속박물관, 인사동과 동숭동,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을 모두 하루에 엮을 수 있으니 문화관광 종합세트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또 기무사 뒷길로 살짝 돌아서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길에 이슬처럼 맺혀 있는 한옥들과 아기자기한 공방과 사설박물관들이 야생화처럼 피어 있어서 감성의 마디마디를 자극한다.

21세기가 오자 많은 나라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문화의 무장화로 분주하다. 더불어 요즘 새로 등장한 유형은 문화도시를 찾아다니는 '문화사냥꾼'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관광객이 대거 몰리고 대형 투자가 뒤쫓는다. 이미 뉴욕.런던.파리.마드리드.도쿄 등은 이들의 수첩에 오른 지 오래고, 최근에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하나만으로 그 명단에 올랐다. 요즘 이들이 애타게 찾는 것은 아시아의 문화도시다. 현대미술관의 도심 이전은 이 문화 사냥꾼들을 불러모을 뿐 아니라 그동안 박탈당한 문화 욕구로 메말라 있던 우리의 가슴도 촉촉이 적셔줄 것이다. 기존의 과천미술관은 주변의 산과 위락시설을 연계한 특수미술관으로, 서울의 새 미술관은 현대미술센터로 차별화시켜 자매 미술관으로 만들면 어떨까. 런던의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 만든 'Tate Modern'과 기존의 'Tate Britain' 두 미술관을 오가며 언니 미술관을 보면 동생은 어떤지 꼭 봐야 했으니 달리 애쓰지 않고 시너지 효과까지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강원 시인.수필가

◆약력=세계장신구박물관장, (시집)카멜레온의 눈물, 행복케이크레시피, (수필집)세상을 수청드는 여자, 탱고와 게릴라, 외교관 부인으로 25년간 아홉 나라에서 생활, 콜롬비아와 쿠바의 시인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