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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28> 요지경·삼천갑자동방삭의 유래 동양의 여신 '서왕모'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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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강의 중 농담을 했는데 썰렁했던 적이 있다. “여러분 이것 모르면 간첩입니다.” 당연히 웃음이 터질 줄 알았는데 학생들은 멀뚱멀뚱,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다. 아차! 싶었던 것이, 세상이 변해 요즘은 반공교육을 예전처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먹었던 것이다. 안보의식의 무장해제는 위험하지만 불원(不遠) 통일이 되어 정말 ‘간첩’이란 존재를 잊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여건이 되면 빨리 망각할수록 좋은 것이 있지만 망각해선 안 될 것을 망각하는 것은 문제다. 지난번 종횡자(필자)는 사라진 동양의 여신으로 미녀 항아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생명의 여신 서왕모(西王母)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마 근대 직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이 여신을 모르면 그야말로 ‘간첩’이었을 것이다. 항아만큼이나 인기가 높았던 서왕모는 처음 문헌에 나타날 땐 마귀할멈과 같은 모습이었다. ‘서왕모는 그 형상이 사람 같지만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하고 휘파람을 잘 불며 더부룩한 머리에 머리꾸미개를 꽂고 있다. 그녀는 하늘의 재앙과 형벌을 주관하고 있다.(西王母其狀如人, 豹尾虎齒而善嘯, 蓬髮戴勝, 是司天之?及五殘)’(『산해경(山海經)』 ‘서차삼경(西次三經)’)

 이렇던 서왕모가 나중에는 아름다운 모습에 불사약을 지닌 생명의 여신으로 거듭난다. 프로이트(S Freud)는 인간의 마음속에 살고 싶은 본능 곧 에로스적 욕망과 죽고 싶은 본능 곧 타나토스적 욕망이 공존한다고 말했는데 죽음의 여신이자 생명의 여신이기도 한 서왕모는 이런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서왕모의 궁궐 옆에는 요지(瑤池)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반도원(蟠桃園)이라는 복숭아밭이 있었다고 한다. 요지 호숫가에서 벌인 잔치가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나온 ‘요지경’이라는 말과 반도원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오래 산 사람인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서왕모에 대한 숭배는 당(唐)나라 때 절정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기도 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문인들이 그녀를 찬미하는 시를 썼지만 특히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사랑은 유별났다. 불우했던 그녀는 서왕모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역경을 초월하고자 했다. 지식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서왕모는 유명했다. 무가(巫歌)를 보자. ‘그때 태자 성조씨는 청조(靑鳥)에게 편지 전한 후로, 계화부인 답서오기를 조석으로 바라드니.’(‘성조풀이’) 청조는 서왕모의 사자로 연인들의 편지를 전달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실이나 양반집에서는 서왕모가 요지에서 잔치하는 그림인 ‘요지연도(瑤池宴圖)’를 비치해 부귀영화를 기원했고, 임금님 앞에서는 반도원의 복숭아를 바치는 것을 상징한 ‘헌선도(獻仙桃)’라는 춤을 춰 장수를 축원했다. 항아와 서왕모,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동양의 여신들을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비너스와 헤라 같은 이방의 여신들이 횡행하고 있는 이 현실이 속상하다.

 이화여대 무용과 조기숙 교수는 작년에 ‘그녀가 온다-서왕모’라는 타이틀로 발레극을 공연한 후 이번엔 ‘그녀가 온다-항아’를 준비 중이다. 마치 초혼제를 지내듯 사라진 동양의 여신들을 소환하는 몸짓이다. 서왕모여! 돌아오시라.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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