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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고령 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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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박씨는 김·이에 이은 우리 나라 3번째 태생. 남한에만 약4백만명, 전체인구의 10%를 웃도는 숫자다.
그러나 그중 고령 박씨는 불과 3만여명으로 「대성속의 희성」인 셈.
신라왕손 만파일원-.
모든 박씨들은 한결같이 신라왕족의 후예라는 것과 한 할아버지에서 갈라져나간 한 핏줄이라는 것을 큰 공지로 삼고 있다.
옛 문현에는 박씨의 본관을 3백여개로 치고 있으나 이는 분포지역의 표시로 생각되며 현재는 64본이 쓰인다.
이 64본 박씨의 한 할아버지가 신라 첫 임금 박혁거세.
고령 박씨는 박혁거세의 29세 되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둘째아들 설양대군 언성의 후예다.
우리 나라 박씨의 80%를 차지하는 밀양 박씨의 선조는 고양대군의 형인 밀성대군 언침으로 경명왕은 밀성·설양 등 8대군과 국상공파의 선조인 교순 등 아홉 아들을 두어 태반의 박씨가 모두 그의 후예. 역사상 가장 많은 후손을 둔 사람의 하나일 듯 싶다.
고령 박씨는 비록 수는 많지 않아도 64본의 박씨 가운데도 주축을 이루는 밀양·반남·고령·함양·죽산·충주·순천·무안 등 소위 「8박」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조에 58명의 문과급제자를 냈고 그 중에 정승1명(철종조좌의정박영원), 책백리 4명을 내는 등 밀양·반남에 버금가는 세력을 누렸다.

<꿈속서 시제 알아>
역사상 고령 박씨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암행어사」 박문수.
훗날 도승지·어영대장·병조판서 등 문무의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했지만 으례 「암행어사 박문수」로 통용될 만큼 많은 일화를 남긴 한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숙종17년(169l년) 경기도 진위현(현 평택군 진위면)태생. 증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구당 박장원, 조부 또한 이조판서를 지낸 박수, 아버지는 좌찬성까지 오른 박항막. 대대로 큰 벼슬을 한 가문이었으나 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죽고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민·활달한데다 기지와 유머가 풍부했다. 우리 역사상 일화가 가장 많은 인물로 꼽힐 그의 일화는 과거급제서부터 시작한다. 신령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과천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얼핏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어디로 무엇 하러 가느냐』 고 물었다. 『과거보러 간다』고 하자 『과거는 이틀 전에 끝났는데 정신없군』하며 웃더라는 것.
깜짝 놀라 『글제가 무어라더냐』고 묻자 「낙조」라면서 『아마 이게 장원시라지』하곤 시 한 구절을 읊었다.
낙조토홍괘벽산 한아척진백운간
간진행객편응급 심사귀길장부각
방목원중연대영 망부대상잡자환
창연고목계남노….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빚을 토하고 찬 진마귀는 흰구름사이 날기를 그쳤더라. 나루터를 묻는 손은 말채찍이 급한데 절을 찾는 스님도 지팡이가 바쁘구나. 놓아먹이는 풀밭엔 소그림자가 길고 남편을 기다리는 대위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더라. 푸른 고목 시내 남쪽 길엔…)
노인은 글귀 한짝을 잊었다며 홀연히 떠났다. 깨어보니 객관. 함께 가는 일행들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한양에 도착, 이틀 후 파장에 가 앉았는데 내걸린 글제를 보니 「낙조」. 꿈에 노인이 외워준 시귀를 그대로 옮겨 적고 맨 마지막구절을 단폐초동농적환(단발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오더라)이라고 채워 넣었다. 시관은 이 글귀가 생기발랄하고 발전성이 있다고 평하고 장원에 올렸다. 「박어사장원시」로 널리 알려져 전해온다.
워낙 강직한 성격으로 바른말을 잘해 절대적인 대중의 인기에도 불구, 벼슬길에서는 기복이 많았다.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한 것도 너무 흑백이 분명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으로 친다. 그가 죽자 영조는 시호를 내리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바른말에 얼마나 넌더리가 났던지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해 「직간공」으로 지어 올렸다는 것. 그를 아꼈던 영조가 이를 보고 껄껄 웃고 충헌으로 고쳤다는 마지막 일화다.
조선조 5백년 으뜸가는 한 시인으로 치는 읍취헌 박문 또한 박문수와 같은 사인공파. 25세에 갑자사화를 만나 비명에 갔으나 그의 영폭사시 중 「춘음욕우조상어 노수무석풍자애」 (봄비가 오려하니 새들이 우짖고 늙은 나무 무심해도 바람소리 슬프구나)한 귀는 고금의 명구로 회자돼 온다.
고령 박씨 유일의 정승인 박영원(l79l∼1854)은 당구의 7대손. 박문수의 방손이다.
철종대에 우·좌의정을 역임했다. 고박은 박섬(사인공파)·박환(부창정공파)·박련(주박공파)등 세 사람을 중조로 크게 파가 갈린다. 그중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승인공파와 부창정공파.
고 박정희 대통령도 사인공파 중 향파의 세째집인 직강공파의 후예.
부창정공파에서는 고려말 박광순·박광우·박우생·박림종 등 많은 경신을 배출했고 조선조 들어서는 태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무숙공 박만, 성종 때 대사환, 부제학을 역임하고 책백리에 오른 박처륜 등을 배출했다.

<군인이 무슨 돈 있나>
병자호란 때 청장 용골대와 강화교섭을 벌이다 볼모로 보내기로 한 왕자가 왕족을 가장한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적진에서 죽은 박난영(사후영의정추층·충숙공)도 부창정공파.
임진왜란때 전사한 어모장군 박암남은 주부공파의 후예로 후손들이 경남울산에 l백80여 가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우리집안은 대체로 안분지족의 보수적 기질이 강한 집안입니다. 그러나 때로 그 같은 전통에 대한 반작용인지 조금 엉뚱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지요. 박 어사도 그렇고 어쩌면 박대통령도 그런 셈이라고 할까요) 중앙종친회 총무 박재영씨(72)의 말.
박대통령은 59년 종친회가 처음 결성되었을 때부터 「고문」으로 추대돼 사망할 때까지 종친회 고문으로 돼있었다. 당시 육군소장이던 그는 종친회에서 기금출연 등을 요청하면『군인이 무슨 돈이 있느냐』고 약간씩을 내놓았을 뿐 종친회 행사나 사업 등에는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6l년 5·16으로 국권을 쥔 뒤에도 문중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문중에선 『너무 한다』 는 원망도 없지 않았다는 얘기다. 대통령 덕에 출세한 종친도 없다. 큰조카인 박재홍씨 정도가 유일한 예외. 동양철관을 경영하다 11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신라55대 경애왕 이래 천년만에 국권을 다시 쥐었다고 박씨, 특히 고령 박씨들은 가문의 영예로 삼았다.
한가지 기이한 것은 이른바 「유신」의 유래. 그의 조상 중 가장 걸출한 어사 박문수가 일찌기 영조에게 탕평책으로 나라를 일신하도록 권유하는 상소문에서 「함여유신해지대도」 (모두 함께 유신해 대도에 이르자)라는 이상을 피력했다.
물론 박 어사의 유신과 박대통령의 유신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인연이라면 인연.
고령 박씨는 시조가 터잡은 고령을 중심으로 인근 성주·선산·합천 등 경남북일원과 충남·경기 등에 주로 산다. 삼팔 이북에는 황해도와 강원도에 극소수가 살뿐 평안·함경도에는 전혀 없는 이남성. <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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