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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소련 망명 전 북괴노동당 비서가 폭로한 그 생생한 내막|군부·문화계 숙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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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연안·소련파의 숙청이「반당종파분자」또는 「소부르좌분자」라는 낙인이 찍힌 점에서 남노파가 「미제 간첩」혐의로 숙청된 것과 다르다.
그래서 56년8월의 연안·소련파 숙청을 「8월 종파사건」이라 부른다.
그러나 종파라는 것은 일정한 유형도 기준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씌울 수 있는 명분이다. 오히려 김일성에게 씌우면 그 풍모에 가장 어울릴 것이다.
종파분자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종파분자로 낙인찍힌 자와 이웃에 살면서 조석으로 인사를 나누거나 또는 직장이 같아서 오가는 길에 길동무를 해도 종파로 몰릴 수 있다.
북한에서는 어떤 종파에도 가담하지 않는 결백한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가 사귀거나 사업상 연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단 종파로 고발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수법을 쓴 사람은 퍽 많다. 그러나 그들도 미구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종파로 몰리게 될 것임을 그들은 모른다.

<사상검토 폭풍우>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전반기까지 사상검토의 폭풍우(세칭 「집중지도사업」)가 휘몰아쳤다. 이 사상검토는 각 직장과 기관마다에서 진행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대상자에는 책임자뿐 아니라 중견 및 하급자들까지 포함되어 몇 달 또는 몇 년씩 계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사상검토회의는 대개의 경우 중앙당지도만이 파견되어 이들이 만든 각본과 연출에 의해서 긴장되고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중앙당연락부 부부장과 초대 내각정보 총국장을 역임한 연안파 출신의 김호의 경우를 본다. 낮에는 당 지도만의 심문을 받고 밤에는 사상 검토회의에서 반당종파 행위를 자백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호는 검토회의에 나서서 유년시절부터 연안에 들어가게 된 동기, 혁명사업 과정에서의 사상의식의 변화·발전에 관해 당당하게 진술했다.
『여기를 선거 유세 장으로 아는가?』『자랑은 그만두고 종파행위를 한 이야기나 하라!』 『우물쭈물하지 말고 중국에서 장개우의 앞잡이 노릇한 이야기나 하라』는 등 고함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동원된 군중들은 그 드라마의 한갓 관객이 아니라 적극적 참여자이며 주역이다. 어떤 자는 고발된 「반당종파행위」를 순진하게 믿고 증오와 분격을 터뜨린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파묻힌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서 욕구불만 해소의 계기를 찾으려고 한다. 또는 굴욕과 학대를 받고있는 피검토자를 보고 스스로 행운과 우월감에 젖어있는 사람들도 있다.
언제나 고발·성토하는 자의 목소리는 피검토자의 자신 없는 목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지고 격정적이다. 그들은 마치 목소리의 크기나 야비한 말투가 논리성과 진실성의 분량을 재는 척도나 되는 것처럼 날뛴다.
「8월 종파사건」의 여파는 군사간부의 숙청으로 절정을 이룬다.
58년4월쯤 김일성은 김웅(상장) 방호산(상장) 장간산(중장) 왕련(중장) 이맹성(소장), 그 밖의 수십명의 고위 군 간부를 숙청했다.
그 수법에는 「스탈린」의 군 간부 숙청과 동일한 특징이 엿보인다. 사건의 조작이 그것이다. 「스탈린」은 자기 정보원을 이용, 소련군의 최고 군 간부들을 외국첩자로 등장시켜 교묘하게 사건을 조작했었다. 김일성은 폭동조직 계획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이것을 군의 최고간부 숙청에 이용한 것이다.
김일성 측의 소식통에 따르면 김웅을 비롯한 연안출신 군 간부들이 평양과 원산 등지에서 반정부 군사폭동 등을 계획한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평양에서는 장평산 휘하 4군단(평양지구) 주둔의 병력과 건설여단(포로귀환병여단)이 합류해서 공군의 지원아래 주요 정부청사를 비롯, 공공기관을 점령하고 김료봉·최창익 등의 지시 하에 정부를 전복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군사폭동작전계획」은 김웅의 지도아래 작성된 것으로 되어있고, 이를 물증 삼아 때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도 했다.
김일성도 당이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이 「군사폭동작전계획서」가 어떤 경위로 만들어졌는가. 물증으로 있는 그 계획서라는 것은 원래 「군사폭동작전계획서」가 아니라 「폭동진압계획서」였다.
56년9월 폴란드사건이 일어나고 그 뒤 그 불꽃이 비화하여 헝가리 사건에로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전술한 바와 같이 김일성의 정치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당초에는 그와 반대로 김일성에게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문인은 「소부르좌」>
그래서 김일성은 당시의 군 총참모장 김광협을 통해서 만약 폴란드사건과 같은 폭동이 일어나는 경우를 상정해서 이를 어떻게 진압할 것인지, 대책을 강구하도록 폭동진압 계획서의 작성을 명했다. 김광협은 즉시 자기의 집무실에 최용진(집단군사령관) 최현(집단군사령관) 유경수(집단군사령관) 최인(집단군사령관) 유성철(작전국장) 왕련(공군사령관)등을 소집하고 김일성의 명령을 전달, 폭동진압 대책을 토의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폭동진압작전계획서」였다.
이 계획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공군사령관 왕련이 내무성과 합류, 폭동을 진압하도록 되어있고 특히 불평이 많은 포로귀환병들을 포위, 섬멸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무성과 소방대원은 소방펌프로 폭도의 진격을 저지하고 당 및 정부청사·방송국·은행·역 등을 방위한다는 등이 그 계획서에 적혀 있었다. 그 계획의 기본골자는 그 지방의 주둔군과 내무기관 및 공군의 통합작전이었다. 김일성은 주민 탄압을 위해 작성해놓은 작전계획서를 군 간부숙청의 물증으로 바꾼 것이다.
한편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약간 이데올로기 냄새가 풍기는 「소부르좌」의 레테르가 붙여졌다. 그리고 북한 문화계의 주요인물은 특히 남노파 숙청이후 소련파가 주축을 이루었으므로 「소부르좌」에 대한 사상투쟁의 대상은 소련출신의 문화·예술인이 해당된다.
박창옥·기석복·정률·전동혁 등의 소련출신이 그 첫 희생자들이었다. 이들은 남한에서 월북한 문화인들, 예를 들면 이태준·김남천·임화·이원조·김순남·신불출·심영, 그 밖의 작가·예술가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활동을 정상적으로 보장했다는 점에서도 숙청의 혐의가 하나 더 보태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푸쉬긴」「톨스토이」「고리키」「마야코프스키」등의 문학작품을 필요이상 찬양, 보급시킨 혐의로 「소부르좌」사상의 보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상식을 벗어난 김일성과 그 일당의 평가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박창옥 (「노동신문」주필·당 선전선동부장) 기석복 (「노동신문」주필·당 선전선동부부부장) 정률 (문예총부위원장) 조기천(문예총부위원장) 정국녹(「민주조선」주필) 박길룡 (조선문화협회 부위원장) 김일룡 (평양국립극장총장) 등은 해방 후 북한의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소련의 문화정책을 도입한 공로가 있다.
특히 그들은 창작활동과 문예평론 활동에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장편소설 『백두산』의 작가 조기천의 창작활동이 특히 두드러졌고 김일룡은 많은 소련 희곡들을 번역, 무대화했다. 기석복 정률 박창옥 박길룡 등은「고리키」「마야코프스키」「쇼토프」등 소련작가의 창작활동을 소개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법을 널리 소개한 평론가들이었다.

<기석복·정률 희생>
특히 기석복은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발굴, 단행본으로 출판해서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정률은 인간성이 풍부한 문인으로서, 홍명희·김사량·황철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특히 그는 김일성 대학에서 세계문학사와 문학원론을 강의한 가장 인기 있는 교수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문학에도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가졌던 그는 김억 김소월 김동환 이상화 김동인 최서해 등의 작품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자랑으로 여겨, 제자들에게는 이들을 우리문학의 유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동혁은 『소련시초』 번역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해방 후 인쇄기술이 조잡하고 마분지와 같은 누르스름한 보 잘 것 없는 종이에 빈약한 장정으로 펴낸 시집이었으나 거기에는 「마야코프스키」 「아사코프스키」 「트왈드프스키」등의 시가 훌륭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왜 이 소련출신의 문화·예술인들을 「소부르좌」로 규정, 탄압한 것인가. 한마디로 김일성 일파가 소련출신의 사상문화선전 활동가들을 제거한 것은 항일 빨치산 시기의 김일성의 문예서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을 문학의 정통으로 삼지 않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런 점은 그들과 교체된 사상문화선전의 활동가들이 「혁명전통교양」을 간판으로 내세워 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해방 후 소련출신의 문화·예술계 간부들로 주류를 이루어온 문예계는 「혁명전통교양」의 오염으로 시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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