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어느 일인의 과거사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63년 전인 1919년2월8일 동경한복판 조선 YMCA에서 우리유학생들이 일으킨 2·8독립선언은 참으로 장한 거사였다. 즉 2·8독립선언은 3·1만세 운동을 유발시켰고 「3·l운동」은 우국지사들을 상해에 모이게 하여 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였으며, 저 유명한 북경대학생들의 5·4 항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우리민족사에 막중한 의의를 갖는 2·8독립선언일인 데도 불구하고 해방 3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기념식 한번 없었으니 도대체 말이 되는가.
작년 말 이런 뜻을 서울 YMCA에 제의했더니 다행하게도 Y측에서는 『우리들은 동경 Y회관에서 2·8선언이 거행됐기 때문에 그곳을 「독립기념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침 금년에는 신축된 Y건물 안의 강당을 「2·8기념관」으로 이름짓고 기념비 제막식도 있으니 독립유공자협회와 Y가 공동으로 일을 추진시키자』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안성마춤격으로 잘 진행됐고 동경에서의 2월8일 행사도 그런 대로 잘 끝낸 다음날 동경에 있는 한국연구원원장 최서면씨로부터 『일제 때 황해도지사·전남지사 그리고 우리독립지사들을 잡아들이던 총독부 보안과장직을 고루 지냈던 「야기」(팔목·80)란 사람이 조나한 회장(83·전 임정국무위원·현 독립유공자협회회장)께 과거를 사죄하겠다는데 받으시겠느냐』는 전화연락이 왔다.
이 말을 들은 조 회장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자네들이 나가서 들어보게』하였지만 최 원장의 부탁도 있고 해서 일행은 마련된 장소에 나가봤다.
팔목씨는 조옹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다음 악수를 청했다. 하나 조옹은 거부하는 몸짓으로 두 번이나 바른손을 내젓는 것이 아닌가.
『조회장님, 여기 이 팔목씨는 지금도 한국인이 재판 받는 곳이라면 어디나 뛰어다니며 신원보증을 서 주기도 하고…』 라는 말부터 시작, 그간의 팔목씨를 설명했으며 조옹은 팔목씨에게 여러모로 상세한 질문을 하며 그의 전모를 캐묻더니 약 30분간의 인물시험(?)을 마친 다음에야 『이제 당신의 진심을 본인은 잘 알았소. 하나 당신 혼자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일본인이 사과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 주기 바라오. 일본은 우리에게 못할 짓을 참 많이 저질렀소. 당신네들의 죄악을 우리들은 잊어버릴지언정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오』라고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네,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죄인도 개전하면 선인이 된다고 했소. 자, 이제 우리 악수합시다.』
그날의 조옹은 각본·연출을 겸한 참으로 능숙한 명배우 같았다.

<놀랍다. 역시 임정의 국무위원답다. 나는 시종 조옹에게 압도당했으나 큰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더할 없는 영광이었다.>
이것은 그후 팔목씨의 실토였다고 최 원장이 알려왔다.
이용상<시인>
▲1924년 서울태생 ▲중국호남성 항일유격대원 ▲문공부 공보·예술국장 ▲KBS국장 ▲현 독립유공자협회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