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40. 저혈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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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70년대 초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비실이 연기를 하고 있는 필자.

신혼살림은 조촐했다. 양은 냄비와 밥그릇.국그릇이 각각 두 개, 수저와 김치를 담는 그릇이 전부였다. 부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당이 부엌이었다. 사과 궤짝을 하나 얻어 방에 두고 찬장으로 썼다. 비 오는 날엔 방에서 밥을 지었다. 그래서 방에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집에는 칼이 하나뿐이었다. 과일 깎는 칼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김치나 깍두기를 담글 때도 과도를 썼다. 하루는 무를 썰던 아내가 그만 과도에 손이 베이고 말았다. 살점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꽤 심한 상처였다. 아내는 결혼 후 처음으로 짜증을 냈다. "쓸만한 칼 한 자루 사다주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시집을 안 오는 건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식칼을 샀다. 그것도 좀체 보기 힘든 외국제 스테인리스 조리용 칼로 말이다.

살림도 살림이지만 한두 달씩 걸리는 순회 공연도 힘들었다. 아내에게 쌀값도 변변하게 쥐어주지 못하고 지방 공연을 떠날 때면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쇼 사회자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젠 내가 출연 약속을 해야 다른 가수들에게 출연 교섭을 할 만큼 스타 대접을 받았다. 우리는 충무로에 전셋집을 구해 이사했다. 사글셋방에서 전셋방으로-. 엄청난 도약이었다. 매달 월세를 내야하는 시달림에서 벗어나니 정말 꿈만 같았다.

이듬해 아내는 달덩이 같은 딸을 낳았다. 첫 아내와 1남1녀, 나는 1남2녀의 아버지가 돼 있었다. 이름은 '주영(珠英)'이라고 지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영화 배역도 단역에서 벗어나 조연급으로 높아졌다. 또 이런저런 쇼단에서 전속 제의가 들어왔다. 1964년에는 돈을 모아 어머니 회갑 잔치를 푸짐하게 치렀다. 그리고 60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아담한 양옥도 마련했다.

그런데 내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몸에 저혈압 증세가 나타났다. 당시 추석은 큰 대목이었다. 쇼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개 두 마리만 무대 위에 올려놓아도 극장이 미어터진다'고 농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종로의 피카디리극장에 섰다. 흰 양복에 검은 와이셔츠와 검은 넥타이, 실크 모자를 쓴 나는 무대에서 만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뒤로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은 푹 쉬어야 합니다." 의사가 왕진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배삼룡이가 무대에서 쓰러졌다는구먼." 문병객들이 줄을 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내에게 나는 농담을 건넸다. "잘못했어.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카루소처럼 무대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 건데. 그럼 나도 카루소 대접을 받는 건데 말이야."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그만큼 나는 무대를 사랑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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