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치슨성명만 믿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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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전한다해도 전쟁의 운명을 좌우하지는 못할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 하나는 미국무장관 「애치슨」이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지역 방위구상으로부터 제의된다고 성명한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장개석과 함께 중국본토에서 쫓겨나 1년도 되지않은 상태이므로 다시 아시아대륙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전징에 개입, 북괴군을 한반도의 남단으로부터 북단으로 격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둘째, 예비병력이나 무기보강에 대한 대책문제다. 이 문제에서도 김일성은 전략가로서 낙제생이었다.
부산과 대구를 향해 전군을 투입해 남진하는데만 신경을 쓰므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끊기자 븍괴군은 많은 병사를 버리고 패주했다. 인천방어의 임무를 최후까지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최용건은 병사들 앞에서 오기찬여단장의 삼성견장을 떼어버렸다.
그러나 사태가 그지경에 이르러서는 오여단장이 아니라 김일성이라도 어쩔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오기찬여단병력의 대부분은 충분한 훈련도 받지 못한 강제징집신병들로 무기도 완전히 보급돼 있지 않았다.
후방에 예비병력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의 예로도 설명될 수 있다.
50년8월께 븍괴군이 가장 위세좋게 남침을 계속하고 있을때 남포해안에서 미군함1척이 썰물로 수심이 얕아져 약8시간이나 움직일수 없게되었다. 최용건도 해안까지 나왔었지만 모두들 팔짱을 낀채 구경만 하다가 그대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밀물로 군함이 빠져나갈 때까지의 8시간동안 군함을 격파할 대포1문도 준비할수 없을 정도로 후방은 허술했다.
셋째, 김일성은 남한의 동조세력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실패의 원인을 박헌영·허성택등 남노당지도자들이 게릴라활동을 제대로 못한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전남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장이고 북괴노동상이었던 허성택에게 유격운동실패의 책임을 물어 강등처분을 내렸다.
실제로는 남한안 게릴라활동에 대한 기대는 김일성의 오판이었다.
넷째,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군사정세에 맞춰 새로운 전술을 제시, 난관을 해결해야한다. 그러나 서울점령후의 모든 전투가 작전계획도 없이 무모한공격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김일성이 명확한 전략사상이 없는 모험주의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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