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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명희씨 개인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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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화가 김명희(54)씨는 칠판에 그림을 그린다. 그는 1990년 강원도 춘성군 내평리의 한 폐교에 작업실을 냈을 때 칠판을 발견했다.

깨진 유리 대신 바람막이가 됐던 낡은 칠판은 김씨에게 시간과 공간과 이미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바탕이 됐다. 희미하게 분필 자국들이 남은 칠판 위에 아이들이, 어른들이, 나무들이 돌아온다.

시베리아 벌판의 자작나무 숲 사이를 달리는 기차가 기적을 울리고, 고대인이 쌓은 거대한 봉분이 세계 지도 위에서 한 길로 이어진다.

오일 파스텔로 단단하게 고착된 그 순정한 형상들은 끊임없이 부유(浮遊)하는 인간의 조건을 돌아보게 만든다. 검푸른 화면에서 옛날은 오늘과 만나 새로운 별자리를 이룬다.

만질 수 있는 세계와 만질 수 없는 세계 사이를 이어 불변하는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 김씨의 손이다.

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개인전에 그는 '유전(流轉)의 역동성'이란 제목을 붙였다. 작가는 외교관이었던 부친을 따라 떠돌던 어린 시절부터 인류학적 이주사(移住史)에 관심이 많았다.

아득한 옛날, 유목민이었던 조상이 정착민이 되면서 일어난 수많은 여행, 그 풍경을 머리 속으로 즐기는 '메타 여행'이 즐거웠다.

화가는 이제 기아나 전쟁으로 인한 난민, 정치적 압력으로 인한 소개(疏開),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이민 등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유목을 이루는 세계를 바라본다.

97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은 6년 세월이 흘렀어도 작가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한민족과 러시아인의 피가 섞인 젊은 여성의 초상화인 '혼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다 화석이 돼 가는 노부부를 담은 '추방'(사진)은 뿌리뽑힌 이들을 대신해 망향가를 부른다.

김씨에게 소중한 것은 이 새로운 유목의 시대에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이다. 우리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구할 수 없는 윤회와 목마름으로 뱅뱅 돌고 있다. 그의 칠판 그림은 아득하고 신비한 먹빛 화판 위에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자기를 실종한 영혼들에게 안식의 피난처를 주려 한다. 02-734-61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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