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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따며 전우애 키우는 해병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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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28일 진해 해군사령부 육상경비대대에 근무하는 해병대 장병들이 경남 밀양 산내면 한 농가에서 봉사활동 중 빨갛게 익은 사과를 들어보이고 있다. [차상은 기자]

가을 하늘이 유난히 높았던 28일 오후. 경남 밀양시 산내면의 한 사과농장에 빨간 명찰을 단 군인 45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구령에 맞춰 절도있는 걸음으로 사과밭에 들어갔다. 구릿빛 얼굴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해병대 장병이었다.

 주민들은 “갑자기 군인이 왜 왔느냐. 간첩이라도 나왔나”며 웅성거렸다. 그 사이에 한 지휘관이 외쳤다. “작업개시!” 한 손에 가위를 쥔 장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사과를 따서 상자에 담았다. 마을 주민 송정열(64·여)씨는 “군인이 일손을 도우러 이 동네에 온 건 사과농사 40년 만에 처음”이라며 반겼다. 빈 상자 50여 개는 2시간 남짓 만에 가득 찼다. 농부 혼자서는 며칠간 땀흘려 따야 가능한 양이다.

 장병은 진해 해군사령부 육상경비대대의 해병대원들. 진해에서 1시간30분간 버스를 타고 왔다. 봉사활동 전에는 호국정신이 깃든 인근 표충사를 둘러봤다.

 이번 봉사활동은 지난 8월 부대 대대장에 취임한 강문호(47)중령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병사들과 상담하면서 많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부대 내에서만 생활하는 병사들이 의욕이 없어보였고, 일부는 딱딱한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항상 피곤해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라도 부대를 떠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부대원간 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활동을 떠올렸다. 곧바로 밀양 얼음골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해병대 선배 박영식(57)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들 좀 데리고 갈 테니 일을 시키고 해병대 선배로서 조언을 부탁합니다.” 박씨는 “마침 수확철이라 일손이 많이 부족했는데 다들 데리고 오라”며 흔쾌히 맞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사과를 따던 장병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하지만 서로 목마를 태워주며 사과를 따거나 무거운 사과 박스를 맞잡고 나르면서 얘기 꽃을 피우는 장병의 표정은 밝았다. 김승태(23) 병장은 “군 복무 중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값진 경험을 해 뿌듯하다”고 말했다. 박홍준(22)상병은 “빨갛게 익은 사과를 따며 부대원간 정이 두터워졌다”라고 자랑했다.

 주인 박씨는 군 생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군에서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면 사회에서도 평생 친구가 된다”며 장병 사이의 우정을 강조했다. 군대 내 총기·폭력사고 등을 염두에 둔 이야기였다. 그는 부대에는 사과를, 장병에게는 손수건을 선물했다. 이날 봉사활동은 재난발생 때의 대민지원과 달리 부대 자체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부대 측은 도시락도 미리 준비했다.

 강 중령은 “군인이 총을 쥐었을 때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 먼저 떠올라서는 안 된다”며 “지휘관이 조금 피곤하더라도 병사 입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 해 스트레스를 풀어주면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 중령은 유엔평화유지군과 미국 워싱턴 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7월 귀국했다. 부대원들이 좋아해 부대 측은 29일에도 사과수확을 돕기로 했다.

글, 사진=차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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