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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박 대통령·김 대표, '뒤끝'은 없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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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영화 찍나, 와 이라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복도에 모여든 기자들과 카메라를 보며 반농담 조로 말했다. 10월 21일, 몸이 나른해질 만한 오후 4시쯤이었다.

 웃을 상황이 아님을 김 대표는 곧 알게 됐다. 바로 직전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공식 브리핑에서 “김 대표의 개헌 발언을 우리는 ‘실수’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설명을 기자들에게서 들었다. 중국 상하이 개헌 발언(16일)의 뒤끝이 이리 길 줄은 몰랐을 거다. 바로 다음 날 사과발언을 하면서 불을 껐다고 생각했을 텐데 나흘이 지난 뒤에도 청와대는 저런 반응을 보였다. 실수가 아니라면 뭔가. ‘도발’로 본다는 것 아닌가.

 ‘영화 찍냐’던 김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얘기할 생각 없다” “일절 말 안 한다”고 오히려 무성(無聲)영화를 찍더니 문을 쿵 닫고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갈등전선은 또 한 군데에 쳐 있었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당이 앞장서서 올해 안에 밀어붙이라는 청와대와 정부, 그게 현실적으로 되겠느냐는 김 대표였다. 그날 혼자 사무실로 들어간 김 대표의 선택이 여권의 항로를 가를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권력은 속삭인다. ‘한번 정면돌파해 봐, 여기가 승부처야. 정치인생을 걸어!’라고.

 그러나 10월 22일. 김 대표의 메시지는 “싸울 생각이 없다”였다. 이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다. 예컨대 전임 황우여 대표가 “대통령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겠는가. 하지만 말꼬리를 잡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는 납작 엎드렸다. 개헌엔 계속 “그 자체에 대답을 안 하겠다”는 식이었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대해선 법안도 자기 이름으로 내고, 연말까진 어렵겠다더니 “연말까지 기다릴 게 뭐 있느냐. 더 빨리 하라”는 식으로 27일 개혁안을 확정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 식의 고집 같은 건 없었다. 29일엔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국회에서 만난다. 천둥번개가 칠 것 같던 당·청 관계가 갑자기 훈훈해졌다.

 박 대통령을 공격하고 김 대표를 편들던 야당의 박지원 의원만 혼자서 비장하게 감정을 잡은 꼴이 됐다. 김 대표가 박 대통령과 한판 붙기를 기대했겠지만 액션신을 기대했던 순간에 갑자기 장르가 시트콤 아니면 휴먼드라마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기에 남의 집 싸움 붙이는 식의 대응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김 대표가 물러선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 김 대표다. 대통령의 힘이 살아있을 때, 반기를 들었던 여당 대표의 운명을 안다.

 가장 최근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갈등을 빚은 사례는 이명박 대통령과 안상수 대표다.

 2010년 청와대가 감사원장으로 추천한 정동기 전 민정수석을 안 대표 및 당 지도부가 낙마시키려 하자 이 대통령이 대로했다. 청와대 관계자가 “이 대통령은 딱 한 사람에게만 감정이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이 대통령이 안 대표 면전에서 “많이 컸네”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안 대표는 반성문을 세게 써야 했고, 권위가 떨어졌다. 솔직히 안 대표야 ‘바지사장’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였지만 김 대표는 다르다. 미래권력의 반열에 오른 그라 야당까지 주목했던 거다.

 국민 입장에선 당이나 청와대가 직접 소통하면 될 걸 대표 취임 100일 만인 미래권력과 현재권력이 언론을 통해 ‘실수’이네 아니네 하면서 충돌한 것, 싫다곤 했으나 ‘싸움’이란 단어가 나온 것이 모두 불안할 일이다.

 개헌 발언에 관해 ‘정당방위’를 주장하던 김 대표가 묵비권을 행사하면서야, 연금개혁의 총대를 세게 메면서야 갈등 상황이 봉합되어가는 것도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다. 이젠 최소한 뒤끝이라도 없어야 한다.

 이 국면에서 보인 김 대표의 모습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위기국면을 수습하긴 했지만 밀리고, 밀리고, 밀렸다. 중후한 중년이 갑자기 동안(童顔)이 된 느낌이랄까.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