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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량 전 특파원이 파헤친 서독의 두 얼굴(4)|라인계곡의 사우디 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서독을 찾는 의국인들은 그들의 대륙적 기질에 감탄하게 된다.
식당에서 거리낌 없이 수프 없이 식사 주문을 할 수 있고.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수프를 주문하지 않으면 멸시하려드는 프랑스 사람이나 길을 반대로 가르쳐주는 영국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80년여름 「할리든 사우디 국왕이서독을 방문했을 때다.
「할리드」국왕을 위한 교통수단을 보면 마이크로 버스보다도 큰 2대의 벤츠 리무진과 4대의 헬리콥터, 라인강 선유를 위한 유람선까지 제공된 초호화판이었다. 국왕의 선유코스인 라인계곡엔 테니스장 크기의 사우디아라비아국기를 계양,「할리드」국방의 환심을 얻어냈다. 그러나 게르만인의 국빈대접이 반드시 정중하지만은 않다.
81년 여름 본사를 방문한「지아 우르·라만」 방글라데시 대통령과 「힐라·리만」가나 대통령의 경우는「할리드」국왕과는 정 반대였다. 차량들의 사이렌소리만 요란했을 뿐 라인계곡의 깃발은 커녕 선유스케줄조차 없었던 것도 물론이다.
이해에 민감한 게르만인의 2중성을 보인 사례들이다.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하고도 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서독수상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팔레스타인 자결권을 주장한「슈미트」수상처럼 자국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게르만인 기질의 일면이다.
80년10월 터키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겐셔」외상이 바로 지지를 보내면서 원조를 증액하겠다고 밝힌 것도 게르만인의 기질을 나타낸 한 보기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남미의 인권문제를 들먹이고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에서 쿠데타가 발생하면 서슴치않고 비난을 퍼부어온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다. 이렇게 게르만인의 평가기준은 그 대상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연간 한 두 차례씩 본 근교의 멜렘콜럽에서 열리는 아시아대사 친목골프대회에선 가끔 불평이 터져 나온다.
어떤 대사는 부임 몇 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신임장을 제정할 수 있었다고 투덜댔고 고참들은 외무성을 방문했댔자 담당관과의 면담이 고작이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 같은 현상은 개인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외국어린이들이 피부색깔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란 겉으로는 없다.
외국어린이들은 독일어린이들과 함께 다정스레 공부하며 어울려 놀고, 학부모회의에서도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그토록 정중하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대화조차 기피하는 프랑스나『굿모닝』하고 먼저 인사를 보내도 고개만 끄덕일 뿐인 영국에 비한다면 게르만인들은 그런대로 순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상의 차이에 불과하다.
교실바깥에서 외국인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서독어린이는 드물다. 심지어『커닝도 저희들 끼리만 한다』고 한 외국어린이는 말한다.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기대를 가져서도 안된다. 한국인 가정의 불고기파티에 초청받은 한 서독어린이가 그 답례로 한국어린이를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오라는 시간이 저녁8시여서 식사까지 기대하면서 갔다가 주스한잔 대접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식사가 빠진 저녁초대를 서운하게 느끼는 것은 동양인의 사고 탓일까.
게르만인들은 초대에 답례하는 예의(형식)를 중요하게 여길 뿐 초대된 상에 차려진 음식 (내용) 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철저하게 실리를 따진다거나, 형식만을 갖추는 계산주의를 게르만인의 기질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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