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36. 돈뭉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 영화 "형님 먼저 아우 먼저"(1980년작)에서 할아버지역을 맡은 필자(右).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유랑극단을 따라 충청도 지방을 돌 때였다. 극단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처지였다. 우리는 조치원 공연 중 조그만 여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방이 모자랐다. 주인은 "미안하게 됐다.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님이 쓰시던 방이 있다"며 "괜찮으면 이 방에서 묵으라"고 했다. 구석의 조그만 골방이었다. 나와 연구생 한 명이 그 방에 들어갔다. 방에선 퀴퀴한 냄새도 났다. 한동안 사용을 안 한 탓이었다.

우리는 방바닥에 누웠다. 갑자기 신발 생각이 났다. 나는 며칠 전 새 운동화를 한 켤레 샀다. 구두도 아닌 운동화, 내겐 소중한 물건이었다. 지금껏 헤진 운동화만 신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여관이었다. 그래서 마루 밑에 두고선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궁리 끝에 운동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장롱 위에 놓인 다듬이돌에다 신발을 올려놓았다.

나는 연구생과 밤늦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몸을 뒤척이다 그만 장롱을 툭 치고 말았다. 그런데 신발이 장롱 뒤쪽 으로 넘어가 버렸다. 나는 일어나서 신발을 찾았다. 장롱 뒤쪽에 좁은 공간이 있었다. 신발은 거기에 떨어져 있었다. 거미줄을 헤치며 어렵사리 팔을 뻗어 신발을 집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신발 주위에 종이 뭉치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니 저게 뭐지?" 연구생과 나는 먼지 속에 파묻혀 있는 종이 뭉치를 하나 꺼냈다. 순간 우리는 "악!"하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돈이었다. 담배 개피처럼 돌돌 만 돈을 고무줄로 하나씩 묶은 것이었다. 장롱 뒤에는 그런 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정말 엄청난 액수였다.

우리는 참 순진했다. '이 돈을 슬쩍 해야지'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주인장! 주인장!" 허겁지겁 주인을 불렀다. 그리고 장롱 뒤편을 가리켰다. 주인도 입이 쩍 벌어졌다. "아이고, 이제야 찾았구나.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주인은 몇 번이나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 돈은 집 주인의 아버지가 쌓아둔 돈이었다. 당시만 해도 은행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시골에는 은행도 없던 시절이었다. 읍내라도 나가야 은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집 주인의 아버지는 돈이 생길 때마다 돌돌 말아서 장롱 뒤에 던져둔 것이었다. "아버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돈을 숨긴 장소를 말씀하지 못했지 뭐예요." 식구들을 총동원해 집안 구석구석을 수십 번씩 뒤졌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젠 정말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집 주인은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며칠 더 묵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았다. 우리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주인은 단장에게 사례조로 꽤 많은 돈을 건넸다. 해산 직전에 놓였던 극단은 그 길로 되살아났다. 연구생과 나는 졸지에 극단을 구한 영웅이 돼 버렸다.

배삼룡 <코미디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