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혈점|쌀파동계기로 본 「국제상인」들의 생리와 길태<3>|흥정과 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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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레이건」대통령이 취임하자 일본 미쓰이 종합상사는 재빨리 시카고곡물시장의 콩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카터」가 밀어붙여오던 대소곡물금수 조치를 「레이건」의 새정부가 곧 해제할 것이라는 전망에서였다.
최대의 콩시장인 소련수출이 풀릴 경우 그동안 창고에 쌓여있던 콩값이 하루아침에 뛰어오를것은 뻔한 일. 미쓰이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유명메이커를 제치고 한발 앞서 과감하게 매수작전을 벌였다.
5대메이저였다가 도산한 쿠크사까지 절반을 뚝잘라 차지하는 실력을 과시했던 미쓰이라 이정도의 승부쯤은 자신만만한 일이었다.
예상이 적중, 미쓰이가 콩을 사들인 이후 얼마안가「레이건」은 대소금수조치를 해제했다. 그러나 폭등세를 확신했던 콩값은 아무리 기다려도 제자리 걸음. 오히려 차츰차츰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결국 뒤늦게 팔아치운 미쓰이는 30억엔이라는 거액을 간단하게 날려버리고 말았다.
우리로서는 까마득하게 앞서가고 있다고 부러워하는 일본의 대종합상사도 이처럼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곳이 세계의 곡물시장이다.
우리의 곡물상사현실은 어떠한가. 쌀흉년으로 20억달러에 달했던 작년은 예의로 치고서라도 최소한 10억달러이상의 곡물을 수입해야 하는 황금시장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상사들은 그저 팔장낀 구경꾼에 불과하다.
쌀은 조달청에서 직접 나서서 사들이고 밀은 제분협회에서, 옥수수는 축산업협동조합이 외국 곡물상으로부터 수입한다.
종합상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메이저들의 에이전트로서 입찰 때 서류봉루심부름을 해주거나 견적서를 내주고 커미션 몇푼을 받아먹는 일이다. 그나마 견적해준 내용이 낙찰되어야 커미션이 떨어진다.
사는 쪽은 정부 및 정부의 산하기관이요, 파는 쪽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국제상인들이니 이 거대한 상전에서 정작 우리나라상인들은 발붙일 기회도, 그럴 엄두도 못내 온 형편이었다.
거래주체가 누가되었든 거래내용은 항상 끌려다니는 것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곡물을 사주면서, 그것도 달라는 값대로 다 줘가면서도 아쉬운 것은 항상 우리쪽이었고 큰소리치고 인심쓰는 쪽은 늘 저쪽이었다.
하긴 구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쌀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부족한 쌀을 수입하는 일은 항상 서둘러야 했다. 주식이 부족하니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미국·일본등지의 주재조달관에게 필요한 물량을 긴급확보할 것을 지시한다. 어디 한군데 어긋났다간 누구 목이 날아갈지 모를만큼 화급한 지시다.
조달관이 현지의 쌀장사를 통해 쌀주문을 내기 시작하면서 쌀값은 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미 이쪽 카드 내용을 모두 읽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 몇만t은 별 불만이 없을만한 값을 제시해 안심시킨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마각을 드러낸다. 번번이 그래왔다. 우리쪽이 급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에 더 급하게 만들어 놓고서 유리한 흥정을 벌인다.
그러잖아도 치밀한 정보조직을 통해 한국의 풍·흉년을 점치고 있는판에 갑자기 나타나 몇십만t씩을 사겠다니 마치 칼자루를 쥐어주고 맨손으로 맞서는 격이나 다를바 없다.
쌀에 비하면 밀이나 콩·옥수수등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쌀의 경우 세계 생산량의 불과 3∼4%수준만이 교역되는 까닭에 항시적인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을뿐더러 부르는게 값인 반면 밀·옥수수·콩 등은 세계 생산량의 20∼30%가 항시 거래되고 있으므로 가격진폭도 훨씬 덜하다.
그러나 밀·옥수수·콩이야말로 카길 붕게 등 진짜 메이저들이 장악하고 있는 곡물들이다. 최근 말썽의 장본인 코널이라는 쌀장사는 우리나라에나 큰소리를 치고 있지 소위 5대 메이저로 일컬어지는 대각물상들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불과한 염세상이다.
쌀이야 풍년만들면 수입을 안할 수도 있다. 주식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지 다수확품종개발 여부에 따라 완전자급 가능성도 농후하다.
반면 절대부족한 것, 앞으로 갈수록 더옥 부족해져서 수입을 계속 늘릴수 밖에 없는것이 밀·옥수수·콩이다.
최소한 연간 곡물수입액이 10억달러가 넘는다는 것도 바로 이 3가지 곡물들 때문이다.
어쨌든 이 방대한 곡물수입을 언제까지고 메이저들의 일방적인 연출에 맡겨 놓을 수는 없는 일.
정부든 종합상사든 누가나서든간에 좀 더 싸고 유리한 조건에 사올수 있는 방안이 그동안을 교훈삼아 지금쯤에는 강구되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이 상전에서의 우리쪽 대표선수를 하루빨리 유능한 장사꾼으로 대체시키는것이 첫번째 시도해야할 과제다. 상전은 어디까지나 장사꾼끼리의 싸움이라는 기본논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곡물거래가 어렵다해도 기업이 감당못할 상당한 위험부담과 문제점도 많지만 기업만이 효과적으로 해낼수 있는 장점도 적지않다.
곡물값이 기복이 심하다는 점은 위험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흥정의 소지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흥정」에는 아무리 유능한 관료도 장사꾼을 따를수는 없다.
78년 고추파동이 났을때 조달청관리 L씨는 인도 현지대사관에 고추를 사러갈테니 뉴델리에 그곳 고추상인들을 모아 견적서를 받아놓으라고 타전을 한뒤 출국했다.
그러나 온다는 날에 아무리 기다려야 L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뉴델리로 오는 도중 캘커타에 들러 그곳 브로커를 만나 바로 계약을 체결하고 귀국해버린 것이다. 그 고추들이 바로 썩어서 난리를 치르게 했던 문제의 인도고추였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제돈으로 장사하는 장사꾼이었다면 아무리 무능한들 도저히 그럴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업들이 맡는 것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여차직하면 1백만달러정도는 간단히 손해보는 일이 비일비재한 판에 과연 그런 위험부담을 감당해낼 능력이 있겠는가.
사실 난다긴다하는 일본의 종합상사들도 당하는 판에 우리의 상술로써 메이저들을 감당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인력도 경험도 정보력도 없다.
결국 정부가 응원해주면서 필요한 상술을 학습시켜나가는 수 밖에 없다. 60년대 일본이 그러했다. 종전까지 정부가 메이저들과 직접 거래해오던 밀수입권을 종합상사들에게 넘겨줬다. 일본에 밀을 수출하려면 일본종합상사들을 통해서만이 가능토록 만들어버렸다.,
우리에게도 그럼직한 방법이다. 기본적인 방향설정과 통제는 정부가 계속 하더라도 장사의 핵심인 흥정은 장사꾼에게 맡겨나가는 것이다. <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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