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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기자의 부인 「크롬」여사가 본 평양의 오늘|김일성사상 올가미로 질식상태|북한은 "한말 조국때와 비슷"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북한의 경제체제는 주민들로 하여금 『물건을 산다』는 어휘가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고 장보기에 필요한 간단한 계산능력마저 잃어버린 사회로 한 서독여성의 눈에 비치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을 방문했던 서독의 프리랜서「피터·크롬」씨의 부인「루이즈·크롬」여사는 지난12일자 서독의 주간신문 디차이트에 기고한 북한방문기에서 현재의 북한사회는 스스로 만든 사상적 올가미로 질식상태에 이르렀다며 서방세계에 대한 문호개방이 급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음은「루이즈·크롬」여사의 글을 요약한 내용. <본=김동수 특파원>
길거리나 공장 어디를 가나 새벽5시부터 한밤중까지 대형스피커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꽝꽝 울려댄다. 집집마다 방에는 조그마찬 스피커가 장치되어 있어 1천8백만 북한주민들에게개 쉴새없이 자화자찬하는 노래를 소나기처럼 퍼부어댄다.
4살만 넘어서면 누구를 막론하고 묻지 않는데도 지금까지 북한이 이룩했다는 업적에 대해 지치지도 않고 주위섬겨댄다. 외부원조 하나없이 모두 스스로 이룩했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유치원에서조차 『우리는 행복하다』고들 한다. 먹을 것, 입을것을 모두 해결해주니 실업과 세금이란 어휘도 사전에 없다는 얘기다. 지상의 낙원, 행복의 섬이란 것일까.
섬이란 말이 맞는다면 북한주민의 대다수가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아리송하게 알고 철저히 고립돼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세계와의 통란 엄격히 선발된 사람들 이용할 수 있는 모스크바·북경으로부터의 주2회의 항공편과 북경·평양간의 주2회 열차가 있을 뿐이다.
관광을 위한 교통은 전혀 없고 친척방문이나 여행허가를 받았을때만 기차표를 내준다. 자전거 마저 개인행동이란 이유로 평양에서는 금지돼 있으며 시골에서조차 주민들이 삼가기 때문에 보기가 힘들다.
세상에서 북한만큼 마르크스주의를 극단적으로 실시하는 곳도 없다. 사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이곳에서처럼 집단적이란 말이 문자 그대로 실감나는 곳도 없다. 전부와 전무라는 어휘가 완벽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어찌나 의식이 획일화돼 있는지 중공이 과거 평등을 과시하기 위해 인민복을 입혔던 것과 같은조치를 취할 필요도없다.
그들의 획일성은 개인적인 창조행위로서의 예술마저 자연사시켜버렸다.
저술활동 음악창작 미술도 모두 집단적으로 한다.
외국인들에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김일성에 대한 숭배가 북한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재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행복을 김이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 김일성은 이제 그들에게 『경애하는 김정일』(구두밑창을 곱으로 높여 신어도 자기 부친키에 못미치는)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물했다.
그러나 김이 북한사람들에개 신처럼 중공과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북한사람들이 모르도록 교육시켰다.
이제는 서방강대국을 조롱해가며 자화자찬하는 것만으로는 북한이 근대화할 수 없다는 점이 그 지도층에게 분명해 지고있다.
스스로 만든 사상적인 올가미에 서서히 목이 죄어가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82년 현재의 북한은마치 구한말 쇄국정책을 쓰던 1백년 전과같은 시점에 이르러 있다. 서방세계와 협력하지 않고는발전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처지에 빠진 것이다.
정치국원들과의 대화에서도 북한의 문호개방이 1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절실하다는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양반사회가 민중을 억압하여 근대화의 싹을 질식시켰듯이 북한의 지도층은 김일성주의를 가지고 국민을 옭아매고 있다. 올해만해도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연일
주민을 동원, 수천가지의 대대적인 역사(스포츠궁전·기념비건립 등)를 벌여 수백만 시간의 근로시간을 희생시키고 있다.
북한의 제도는 이제 경제체제에서는 주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일까지 드물게 만들어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게 되고 그에 필요한 간단한 계산능력마저 잃어버리게 했다. 믿을만한 통계숫자를 주민들이 접해본 일도 없고 「당위」는 있지만 「소유」는 찾아볼 수 없게된 것이다.
온종일 세상에 부러울게 없다고 배우고 노래하는 북한사람들은 이제 그들 스스로가 수십광년 떨어지도록 거리를 두어온 다른 세계 -서방세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신뢰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쌍방의 접촉은 모두 서로에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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