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왕국<2>|석유무기화의 발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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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3년10월6일, 토요일.
하오2시5분을 기해 4천문의 이집트 군 각종중화기는 수에즈운하 건너편에 설치된 이스라엘 군 거점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15분 후 8천명의 선봉대는 미그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고무주정을 타고 운하의 5지점에서 일제히 도하 작전을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형태의 공격에 대비해서 비밀무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운하의 동쪽연안에 여러 개의 쇠파이프를 묻어두고 도하작전이 시작되는 즉시 파이프를 통해 네이팜탄을 뿜어대서 운하수면을 불바다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군은 이 계획을 미리 탐지, 작전개시 이틀 전 밤의 어둠을 이용해서 잠수부를 보내 시멘트로 파이프를 막아버렸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제4차 중동 전은 아랍 측이 67년 전쟁에서 겪은 어처구니없는 참패에 대한 심리적 설욕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 이 전쟁은 석유위기라는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후유증을 겪게 만들었다.
이전쟁의 발단은 72년7월「사다트」이집트 대통령의 소련군사 고문단 축출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가 1만6천명의 소련군사 고문단을 축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키신저」는 『「사다트」는 왜 우리한테 이런 특혜를 베푸는가. 왜 먼저 미국 쪽에 여러 가지 반대 급부를 요구하지 않았는가?』라며 의아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집트는 사우디아라비아의「파이잘」왕과의 협의 아래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정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집트가 받아온 소련의 지원을 스스로 중단하는데 있다고 합의하고 이 중대 결정을 내렸다. 소련 고문단을 일단 축출하고 나면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무기지원정책은 적어도 아랍 측에 대해서는 명분이 없어진다고 「파이잘」왕은 계산했기 때문에 「파이잘」왕은「사다트」에게 이 조치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계산은 미국이 냉담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실망한「사다트」는 「파이잘」왕에게 이제 남은 방법은 전쟁 밖에 없다고 말했고「파이잘」왕은 전쟁이 나면 석유무기를 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사태가 그런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기에 앞서「파이잘」왕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미국의 정책을 되돌리기 위해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73년4월「야마니」석유 상이 워싱턴으로 급파됐다. 거기서 그는「로저즈」국무, 「슐츠」 재무, 「키신저」안보담당보좌관을 차례로 만났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만약 미국이 팔레스타인 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의 회교성지를 아랍국민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에 적극적인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증산계획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이 말을 듣자 얼굴 색이 변했다.
『이 말이 새나가면 안됩니다. 나 이외에는 말해서 안됩니다.』
「키신저」는 만약 이 말이 새나가면 아랍 측의 이미지가 손상 될 것이며 특히 미국 유권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과격파로 보게될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키신저」를 만나고 나온「야마니」는 유대인인「키신저」의 그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키신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을 걱정해주기 보다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이유 때문에 석유고갈이란 희생을 겪어야 될지 모른다는 점을 미국유권자들이 따져보게
될 경우를 걱정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야마니」는 미국기자들을 불러 자기가「키신저」에게 전한 말을 공개했다.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이 기자회견의 의미를 간파한 듯 다음날 이렇게 보도했다.
『처음으로 석유초강대국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대한 석유공급과 미국의 중동정책을 연관시켜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점을 과소평가해서『사우디아라비아의 그런 협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경솔한 것이다』라고 주장했고「닉슨」행정부도 이에 공감했다.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심지어「야마니」의 회견 내용이「파이잘」왕의 재가를 받지 않은 그의 독자적 견해라는 의견을 은밀히 기자들에게 흘려보냈다.
왕은 이런 미지근한 반응을 보자 불쾌했다. 그래서 그는 그해7월 타이프 시로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워싱턴 포스트,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미국TV기자들까지 불러 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이 아랍에 반해서 시오니즘을 전적으로 지원하면 우리가 미국의 석유수요를 계속 충족시키거나, 심지어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지속하는 것까지도 극히 어렵게 될 것이다.』
석유금수조치를 취하겠다는 이처럼 확실한 신호가 왕자신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언론이나 국무성 관리들은 다같이 왕이 허풍을 떨고있다고 단정했다.
CIA가 국무성에 보낸 정보분석은 이집트가 실지를 회복하는 작업에 사우디아라비아가 협력하도록 계속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에 왕은 이집트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그런 발언을 한데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외상「에반」도 73년5월 아랍석유금수조치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받고 『눈곱만큼도 가능성이 없다. 아랍국가들은 다른 자원이 없기 때문에 석유수출을 중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속에서 전쟁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파이잘」왕은 이스라엘이 종전까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외국무기덕분이라고 보고 석유금수조치를 취하면 이 외국무기의 줄을 끊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사다트」에게『이번에는 전쟁을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계속하라』고 역설했다. 「파이잘」왕은 다시, 제네바에서 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려던 미국석유회사 중역들을 불러 미국정부에 자신의 의도를 전해달라고 종용했다.
『자칫하면 당신들은 모든 것을 잃게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을 맺었다.
그러나 이들 석유중역들이 워싱턴에 돌아왔을 때 정부관리들은 여전히 냉담했다. 「키신저」는 이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이때만 해도 「파이잘」왕이나「야마니」의 명성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파이잘」왕의 경고도 그저 여러 번 들어온 사우디아라비아의 허장성세 일 뿐 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석유중역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 회사본부에 보낸 전문은 이렇다.
『일부관리는 왕자신의 상상력 속에 있는 늑대만 보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야단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음.』
워싱턴의 분위기는 다섯 달 뒤에 있을「석유금수」라는 이름의 늑대를 보지 못하는 단견 속에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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