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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웃다 80年] 33. 4·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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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호화선 쇼'에서 연기하고 있는 필자(맨 오른쪽).

다시 혼자가 된 나는 1년반 동안 대구를 본거지로 삼아 충청도와 경상도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가수 황정자씨가 이끌던 '7천국 쇼단'에 스카우트돼 서울로 올라왔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였다. 서울에선 전옥의 '백조 가극단'과 '호화선' '무궁화' 등의 악극단이 그나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악극은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신 가수 중심으로 무대를 꾸미는 '그랜드 쇼'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땐 남인수.현인.황금심.황정자.박단마씨 등이 인기 가수들이었다.

나는 '7천국 쇼단'에서 사회를 맡았다. 쇼단 사회자로는 내가 국내 1호였다. 다른 희극배우들이 쇼단의 사회를 맡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였다. 사회자의 역할은 중요했다. 쇼의 간판이었다. 사회도 보고, 코미디도 했다. 코미디는 주로 만담식이었다.

그때는 사회자도 등급이 있었다. 1급 가수 소개는 1급 사회자만 할 수 있었다. 2급 가수에겐 2급 사회자가 따로 있었다. 2급 사회자가 1급 가수를 소개할 수 없었다. 해당 가수에 대한 대단한 결례였기 때문이었다. 쇼는 주로 단성사.제일극장.계림극장.동양극장.시공관 등에서 열렸다.

당시 사회자의 유머는 크게 두 종류였다. 소개할 가수를 꼬집는 내용이거나 은근한 음담패설이었다. 점잖게 차려입은 관객들도 나의 음담패설에는 박장대소를 했다. 물론 준비는 철저히 했다. '고금소총'이나 '금병매' 등의 책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배삼룡이 사회를 봐야 관객이 모인다"고 입을 모았다. 이때부터 나는 고정적인 출연료를 받았다.

1959년이었다. 나는 재건된 군예대(KAS)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른바 육군 후생대원이란 신분으로 군수물자를 물 쓰듯 하면서 전국을 누볐다. 사기 진작을 위한 군 위문공연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반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변칙적인 쇼단이었다.

이듬해 4.19가 일어났다. 군예대는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오후 7시 이후에는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관객이 없으니 극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시국이 어수선하자 육군본부의 지원도 뚝 끊겼다. 우리는 시계와 반지를 전당포에 잡혀 마련한 돈으로 겨우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시내엔 시위 물결이 거셌다. 계엄령과 탱크도 시위대를 막진 못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나왔다. 빗자루로 거리 청소를 하던 시위대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이었다.

당시 배우들은 대부분 정치를 몰랐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흘러다닐 뿐이었다. 그러나 4.19는 배우들의 밥줄을 흔들어 놓았다. 과도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극장에는 손님이 거의 들지 않았다. 사회 분위기가 그만큼 불안했다. 대부분의 배우나 가수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던 딱한 시절이었다. 그들은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위협은 또 있었다. 상당수의 극장에 영화가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악극단의 공연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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