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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주의…자유분방…신세대 군인에겐 가혹행위는 큰 심리적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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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 분향소가 설치된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20일 군 장병들이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현역 육군 대령인 A대령은 지난달 부인과 함께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는 맏아들 면회를 갔다. 그런데 아들은 부대에서 나오자마자 부모님은 뒤로 제쳐놓고 혼자 PC방에 가더니 저녁 때 부대에 복귀할 때까지 대학 친구들과 채팅에만 몰두하더란 것이다. A대령은 "요즘 사병들이 부모 면회 오면 PC방으로 직행한다는 얘긴 들었지만 내 아들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다.

#2.19일 자정쯤 경남 창원 육군 39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병 두 명(20세, 19세)이 부대 담을 넘어 탈영했다가 1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훈련소에 들어온 지 만 사흘 만이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입소한 뒤 여자친구와 연락을 할 수 없어 답답한 데다 군 생활이 생각보다 힘들고 수면 시간도 부족해 탈영했다"고 말했다.

신세대 사병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요즘 입대한 사병들은 대부분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다.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월등히 풍요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 자라났다.

고정적.획일적 관점을 싫어하고 개별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서열보다는 평등주의에 익숙하며 사고방식이 자유분방하다는 공통점도 있다. 기성세대로부터 "인내심이 없다" "자기 중심적이다" "정신이 나약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모든 사회조직 중 가장 보수적인 군대는 거의 모든 면에서 신세대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곳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입대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구타, 가혹행위 등의 경험은 신세대 사병들에겐 견디기 힘든 심리적 충격이다. 독자가 많고 개인주의에 익숙한 신세대들로선 10~30여명씩 함께 생활하는 내무반 생활도 고역에 가깝다.

지난해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31개 부대 사병 34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장병 기본권'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 두 명 중 한 명꼴(48%)로 자신 혹은 타인의 인권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응답했다. 본인이 직접 구타를 당했다는 사병은 23.5%였으며, 언어폭력을 경험한 사병은 58.8%에 달했다. 특히 사병들은 구타보다 언어폭력에서 더 큰 모욕감을 받는다고 응답했다.

구타나 가혹행위를 당해도 못 본 척하거나 참는 이유에 대해 이병(36.6%), 일병(30.6%)은 '사병들 사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라고 답변한 경우가 많았지만, 상병(40.9%), 병장(46.6%)은 '군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답변해 계급별로도 인식 차가 컸다.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육군은 2003년 8월부터 사병들끼리 명령.지시.간섭을 금지한다는 '병영생활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 일선 부대에 정착되지는 못하고 있다.

육군은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자살 우려가 있는 신세대 장병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나 효과는 아직 미지수다. 육군은 또 인터넷에 목말라하는 신세대를 위해 부대에 PC방을 설치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으나 보안유출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면서 엉거주춤한 상태다.

민간의 군 전문가들은 "신세대 장병을 관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간부들이 리더십과 지휘 통솔방식을 상명하달에서 민주적 토론방식으로 바꾸어야 하며, 사병들을 인격적 주체로 대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군도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한 지휘관은 "미군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월급을 깎는 방식으로 벌을 주지만 우리 병사들은 월급이 적어 그러기도 힘들고, 심한 얼차려를 줄 수도 없어 관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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