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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철근의 시시각각

주사파 대부가 법정에 선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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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김영환. 80년대 주사파 학생운동권에선 그를 강철이라 불렀다. 그가 썼던 ‘강철서신’은 쉬웠다. ‘솔직·소박·겸손’의 품성론은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생활 태도까지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주사파의 대부였던 그가 지난 21일 헌법재판소 법정에 섰다.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사건 공개변론에 법무부 측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김씨는 이날 과거의 동지들을 공격했다. 거론된 옛 동지들은 통진당 국회의원인 김미희·이상규 의원이었다. 그는 “1995년 지방선거 때 나는 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장으로서 하부 조직에 돈을 주면서 후보자들에게 500만원씩 자금 지원을 지시했다”며 “성남에서 김미희 후보가, 구로에서 이상규 후보가 각각 출마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 지원금엔 북한에서 받은 40만 달러와 민혁당이 사업을 해 번 돈이 섞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미희·이상규 의원은 “허무맹랑한 ‘종북 선동’에 분노보다 연민의 정마저 느낀다.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며 강력히 반박했다.

 이날 재판에서도 통진당 측 김선수 변호사는 김씨와 통진당 이석기 의원이 무관하다는 것을 묻는 데 집중했다. 이 의원이 김씨가 북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접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 김씨가 98년 민혁당의 전신인 반제청년동맹 사건 재판 때 ‘이 의원이 구성원인지 몰랐다’고 증언했던 점을 물고 늘어졌다.

 이석기·김미희·이상규 의원은 한때 김영환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NL(민족해방)계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석기 의원은 김영환씨가 민혁당 1인자였을 때 당 서열 5위쯤 하는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았다. 서울대 약대 학생회장 출신의 김미희 의원은 졸업 후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활동한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인물이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을 지낸 이상규 의원도 졸업 후 서울 구로·영등포 지역에서 야학과 노동운동을 했다. 하지만 예전의 동지가 지금은 적이 돼 서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씨의 증언으로 통진당 재판은 거의 막바지에 접어든 느낌이다. 헌재 주변에선 연말께 선고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헌재에서 가장 참고하고 있는 사례는 56년 독일 헌재의 독일공산당 해산 결정이다. 국내외 상황과 재판 쟁점 등이 통진당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독일공산당(KPD)은 49년 창당됐다.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동독에서 집권한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과 연계되지 않은 독자적인 정당이었다. 독일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기반으로 소련 등과의 평화조약 체결, 독일 재통일 등을 주장했다. 당시 독일공산당의 지지율은 매우 낮았다. 49년 연방의회 선거에선 15개의 의석을 차지했으나 53년 선거에선 단 한 개의 의석도 못 얻었다. 정당 해산에 대한 여론이 분분했다. 실체적 위협이 없는데 민주국가에서 정당을 해산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54년 당시 독일 헌재소장이던 요제프 빈트리히가 아데나워 총리에게 청구를 취하할 의향이 없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심리는 계속됐고 독일 헌재는 청구한 지 5년 만에 독일공산당 해산을 결정했다.

 독일공산당은 현 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겠다는 어떤 강령·문서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독일 헌재는 “헌법상 정당의 위헌성은 폭력 혁명의 구체적 기도를 요건으로 하지 않으며 당의 정치 노선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항할 의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영환씨는 재판에서 증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통진당 활동을 막는 방식은 사법적인 판단보다는 정치투쟁, 사상투쟁을 중심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당 해산과 같은 사법적 처리로 했을 때는 자신들이 탄압받고 있다며 지하에서 다시 뭉치는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통진당처럼 폭력혁명과 종북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을 보편적인 정당이라고 판결하게 됐을 경우 국민에게 잘못된 사인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