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4)「국가재건최고회의」(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제3공화국 출범을 준비한 여러 조치 중 그 파문을 길게 남긴 것 중의 하나가 정치활동 정화법이다. 정정법은 참신하고 양심적인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혁명공약에 근거했다.
지난날의 정치질서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책임을 져야할 부패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깨끗한 헌정질서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정법은 과거의 정치권에 발 들여놓지 아니한 각계 엘리트라 해서 뽑아 모은 공화당 사전조직과 함께 혁명주체가 마련한 제3공화국 정치구상의 기본이라고 해야했다.
정정법 구상은 5·16직후 일찍부터 예고되었다.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중장에 이어 최고회의 의장이 된 3주만인 7월26일 광주비행장에서 박 의장은 『부정 부패한 기성 정치인의 정치활동은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8월5일의 월례회견에서 『양심적인 정치인인지 아닌지는 국민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말로 구 정치인의 정치규제를 반대했다.

<특별담화 뒤엎어>
이에 아랑곳없이 박 의장은 민정이양 스케줄을 밝히는 8·12성명에서 『부패 부정한 정치인의 정계 진출을 방지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하겠다』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정치규제는 혁명재판에 계류중인 사람에 한정된 것 아니겠느냐』는 김병로 전 대법원장의 진단이 일반 감각이었다. 특히 박 의장은 미국을 다녀온 직후인 12월11일 특별담화에서 『과거의 죄상은 불문에 붙이고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혁명대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해 낙관적 관측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정작 모습을 나타낸 정정법은 광범한 규제였다. 자유, 민주당 정부의 각료, 5대 국회의원, 정당 간부 외에도 지방의회 의원·국영기업체 의장까지 포함시켜 그 대상자는 4천3백74명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법안의 제안 배경은 최고위원들 모두가 한결같이 알지 못했다. 또 제한 대상의 직책만을 나열한 조문으로선 그 숫자가 얼마일지, 어떤 사람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단지 혁명공약에 따른 입법이라는 「원칙적 찬성」이어서 까다로운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 그 증언.
『정치정화법의 배경은 나도 모릅니다. 박 의장과 김종필씨 정도나 알까…. 그러나 개별 명단이 아니라 정당과 단체 등의 직책을 한꺼번에 묶었고 배경도 잘 몰라 최고회의 심의에선 별 논란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 정화위원을 겸했던 김윤근씨의 증언이다.
『5·16 얼마 뒤 민주당 정권의 내무장관이던 조재천씨 등 구 정치인들과 몇 명의 최고위원이 대담을 한일이 있습니다. <국가건설 하는데 협력하라>고 했더니 별로 말을 않더군요. 하긴 정권을 뺏긴 사람들로서 말하기도 싫었겠지만 그날 최고위원들이 받은 인상은 <구 정치인은 국가 건설에도 무책이다>라는 것이었어요.
구 정치인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은 최고회의의 분위기였습니다. 또 구 정치인 불신으로 일하다보니 정권을 뺏긴 세력에 민정을 맡게 했다가는 원대복귀도 어려울 것 같았고…. 그래서 정정법은 별 이견 없이 통과되었읍니다) (최고위원 L씨의 회고)
그럼 이 법안은 어디에서 성안됐을까.
박일경씨(당시 내각 사무처차장)의 증언.
『정치정화법은 이석제씨가 도맡아 했어요. 당시 내가 법제담당 차장이었는데도 실무작업을 하지 않았어요. 만들어진 법을 보니까 공민권 제한법과 흡사했지만….』
이를 담당했던 이석제씨(전 감사원장)의 증언.
『기대를 걸었던 민주당 정권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습니다. 결국 얻은 결론은 <기성 정치인은 못 믿는다>였읍니다. 그럼 누가 할 것인가 했을 때 근대조직으로 훈련된 군밖에 없다는 답변을 얻었읍니다.
우리는 군의 정치개혁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기성 정치인이 자라면 그들에게 맡기면 된다. 우선은 데이션빌딩(국가건설)단계라 봤지요.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괘씸 죄」도 일부 있었지만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 실증된 만큼 다른 정치 세력을 키워야겠고 그러자니 기성 정치인은 묶어야 했읍니다. 마침 민주당 정권의 「공민권 제한」이라는 소급 입법이 있어 어렵지 않았지요. 대상자들이 어필할 구실이 없었으니까요. 다만 직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숫자가 너무 방대한 것 등 시행착오도 범했읍니다.

<죽은 사람도 끼어>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밖에 죄 될 것이 없는 국영기업체의 장이나 선거에 영향력이 있는 시골 유지라 할 수리조합장 정도까지 포함시킨 것은 문제였습니다. 거기에다 이미 사망한 사람도 10여명이 들어있었습니다. 워낙 바삐 서둘렀기 때문에 소홀하게 다뤄진 것입니다.
김종필 정보부장팀이 만들어 넘겼는데 그들도 서둘렀고 나도 시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실수가 규제를 계획보다 일찍 풀게 한 이유가 됐지만…. 여하튼 이렇게 기성 정치인을 묶은 뒤 새 정치세력을 키우는 문제로 김 부장과 나는 격론을 벌였읍니다. 김 부장의 구상은 각계 엘리트 감을 뽑아 교육 훈련시키는 공화당 사건조직이었고 나는 우리가 만들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신망 있는 인물을 찾자는 것이었읍니다.
사실 정치는 직업 정치인이 맏는 게 원칙이지요. 좋은 의미의 정치인 즉 Politician이 아닌 Statesman이 나오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했지요
어쨌든 기억에 남는 것은 참의원 의원 중에서 백남억씨(후일 공화당의장)를 애초부터 제외시킨 것입니다. 나는 전에 대학에서 그분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정치에 인문한지 얼마 안돼 부패할 사이가 없었다고 봤지요. 이런 식으로 자세히 검토했더라면…』
이 법률은 기성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혁명 정부에 남아있던 윤보선 대통령의 퇴진을 가져왔다. 당시 구 정치인 규제법이 나올 것을 예견했던 유진산씨 등 구 신민당 간부들은 윤 대통령에게 이런 법률이 필연적으로 나올 것이니 그에 앞서 청와대를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들은 정정법에서 윤 대통령만은 제의될 것을 짐작했다. 따라서 규제된 그들은 막후에서 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재야 정당 결성을 도운 다는 구상이었다.
윤 대통령이 상처받지 않고 물러나야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에서 승리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윤 대통령에게 이같이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 법률에 서명하고 물러나 그의 정치이력에 또 하나의 멍에를 보탰다.

<윤보선씨의 증언.>
『박일경 내각 사무처차장이 결재서류를 들고 내 집무실로 왔어. <그게 뭐냐>고 했더니 <과거 정치하던 사람들을 묶는 법>이라며 <약 3천명이 되는데 각하는 현직 대통령이시라 포함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더군. 서류 겉봉에는 <이 사실을 누설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 귀절이 써있더군. 나는 박 차장에게 좀 나가있으라고 하고 비서와 법률가 몇 명을 불렸어.

<대부분 적격심 거부>
그들은 내가 반대를 해도 법은 통과되는 것이고 헌법상 법률을 거부하거나 서명을 안 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래서 반대를 하면서도 사인을 해줬지. 내 마음으로는 서명을 하고 대통령직을 물러나면 된다고 판단했지. 내가 대통령직을 물러난 이후 항상 이 문제로 인해 기성 정치인들의 공격을 받았지. 정구영씨(전 공화당의장) 같은 이도 나에게 <당신이 정정법에 서명을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더군.
일반 국민들은 내가 서명을 했기 때문에 법이 통과됐다고 믿고 있는데 사실 난 억울해. 정말 그때의 내 생각은 대통령이 서명토록 되어있는 법은 준수하고 나만 물러나면 반대의사를 충분히 표현한다고 생각했지. 내가 그 때 법과 정치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 못했던 것 같애.
나는 하야를 하는 관에 서명을 하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떻겠느냐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법과 정치가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지.』
법률 제정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심사는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 해당자에게 68년 8월15일까지 6년반 동안 정치활동을 금지한 이 법률은 구제조항을 설정해 모든 해당자는 공고 15일 이내에 최고회의 정치 정화위원회에 적격 심판을 청구하도록 했었다.
그런데 구 정치인 대부분이 청구를 하지 않았다. 그 증언.
『군정이 끝나고 민정복귀가 된다면 야당이던 우리들 민주당 구파가 집권하리라고 판단했지. 자유당과 신파는 상처투성이고 구 신민당만은 비교적 상처받지 않고 건재해있던 유일한 정통 보수세력이었으니까. 그때 우리는 정식으로 회의는 못 했지만 종로의 H다방은 우리들 연락소고 회의실이었지. 우리는 여기서 적격심판 청구는 않기로 결의를 한 거야. 이 결의는 사발통문으로 빠짐없이 전달됐어. 집권당이었던 민주당 간부들도 이 같은 구 신민당 결의에 전적으로 찬성했고…장관도 지낸 K씨 등 일부가 이 결의를 안 따르고 개별 행동을 했지만 의원들은 70%가 행동 통일을 했지.』
서범석씨 등 구 신민당 간부들의 증언이다.
당시의 발표는 4천여 해당자 중 67%인 2천9백여명이 심판 청구를 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 보면 높은 청구율이었다. 그러나 핵심인물들이 청구를 하지 않아 민정준비 경쟁에서 쟁점이 될 소지를 남겼다.
혁명주체들이 적격판정 심사와 구 정치인 포섭을 병행한 것도 문제였다. 김종필씨는 4대 의혹사건이란 말썽거리까지 남기며 방대한 신당조직(공화당사건조직)을 했지만 정밀한 분석결과는 뿌리깊은 기존 정치세력을 누르기가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특히 최고위원들과의 마찰까지 내다보이는 상황 아래서 이 조직만으로는 군정의 수뇌 박정희 의장을 민정의 집권자로 올릴 수가 없을 듯 했고 설혹 민정의 주역을 맡는다해도 정부안정이 문제였다. 이래서 그들은 구 정치인중의 참신한 얼굴을 찾아 나섰다. 그 실례의 하나.

<추가해금 불가피>
『구 신민당 소장 중 서클인 청조회가 1차로 군정주체의 포섭대상이 되었지요. 「최고회의 조시형 내무위원장이 만나자고 해요. 을지로에 있던 일식집 「새마을」에서 만났는데 서류 하나를 내놓고 서명하라고 해요. 그 문서의 글은 한마디로 <혁명정부의 지표가 우리의 뜻과 같다>는 내용이었어요. 서명만 하면 정정법에서도 풀리고 민정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때는 이미 박준규씨(훗날의 공화당 의장 서리) 등 청조회 멤버가 모두 서명을 끝내고 3∼4명만이 야권을 지키고 있을 때였어요. 나는 혁명주체들의 정당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거절했지요. 그 얼마 뒤인 어느 날 한밤중에 어떤 사람이 불러내 이태원에 있는 어느 단독주택에서 김종필씨와도 만났어요. 끝내 거부하니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집요한 설득 공작이었읍니다.』(구 신민당 Y씨의 희고)
적격심사는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시간에 쫓긴 최고회의 정치정화위원회는 제출된 자료를 토대로 한 서류심사만을 했다.
『법 제정도 그랬지만 실무적인 심사도 다른데서 했어요. 당시 의원장은 이주일 부의장이 맡고 외무·국방분과 위원장이던 나를 포함한 6명의 사임위원장이 위원이었는데 위원회는 법절차에 따른 요식행위 운영되었어요. 그때 이주일 의원장이 <이렇게 광범하게 묶어서야 되겠느냐>는 얘기를 했었지만…』(유양수씨 증언)
이런 우여곡절을 거셔 1차 판결에선 1천3백36명이 구제되었다. 이 숫자는 적격판정 청구자의 45%에 해당됐지만 과거의 정치에 책임이 있는 구 정치권의 중견층 이상은 대부분 구제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입법 취지에서 보면 일관된 처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정치활동 재개의 청신호가 켜지자 문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예상대로 재야 정가에도 신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유당 초기 입가에서 물러났던 얼굴까지 재등장해 정치인구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2년의 군정에도 재야정가의 핵심인물들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그들은 대타를 내세워 해산된 5·16 이전의 그들의 정당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나서 있었다. 그들은 정정법에 묶여 있으면서도 막후에서 창당작업을 주도했고 이것이 재야의 큰 흐름으로 영글어 갈듯했다. 그들이 주도하는 재야의 소리는 해금압력 이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전 조직된 공화당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거부반응 이었다. 혁명주체 중심의 정치권도 재편성의 압력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런 격동 속에서 혁명정부는 정정법의 추가 해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 끝내 박 의장이 민정불참 선언한 「2·27선서」를 계기로 구 정치인에 대한 규제를 사실상 전면 해제함으로써 정정법은 거의 사문화됐다. 결과적으로 해금과 그 단계적 해제로 인해 정치인구만 범람케 하고 창당작업에 혼선을 일으켜 민정을 향한 일가혼란의 부작용만 깊게 남긴 채…. <제1부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