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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1) 제76화??굉인굉(5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울∼여주 1백90리 길을 걸어서 내려갔다. 가다가 날이 저물어 남한산성 입구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고향집에 도착해서는 어머님을 뵙고 집에 와 살고있는 큰 누님과 이웃에 살던 셋째 누님을 만났다. 아우(장우홍)에게는 어머님 잘 모시고 있다가 만약의 사태가 나면 피난하라고 지시해놓고 나 먼저 떠났다.
이천으로 해서 풀 소리를 들으며 수원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리 걸음을 재촉해도 당일에는 갈 수 없어 용인 못 미쳐 양지주막에서 유했다.
내가 주막에 들었을 초저녁에는 2간 장방에 나 혼자뿐이었는데 밤이 되어서는 드러누울 자리조차 없이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서울서 내리 닥친 사람들이 그날 낮에 중앙청에 북쪽 기가 올랐다고 다급해 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서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 새벽밥을 먹고 수원 길을 놓아두고 지름길로 해서 오산으로 갔다.
오산 역에 다다르니 마침 볏섬을 싣고 가는 곳간 차가 있어 그 차에 빌붙어 대전까지 왔다.
대전서 처남 집에 들러 식구들을 만나보곤 다시 대구나 초산으로 내려갈 양으로 역에 나와 동정을 살폈다.
대전 역에서는 대구·부산이 피난민으로 꽉 찼다고 경부선 열차는 태워주질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어「능가의 보도」처럼 또 종군화가 증명을 보이고 대전 역에서 화물차에 올랐다. 무개차 볏섬 틈에 끼어 내려갔다. 날은 왜 그리 춥고 기차는 느림보인지 추풍령고개를 허위단심 기어갔다. 기차는 추풍령 고개서 멎고 말았다.
온 산에 눈이 하얗게 덮여 그믐께인데도 훤했다. 기차는 오늘은 가지 못한다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날이 몹시 추울 뿐 아니라 속까지 비어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마른나무를 주워 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불기운이라도 쬐어 볼까하고 얼씬거렸지만 사람이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어 불기운은 커녕 바람막이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이러다간 큰일날것 같아 어디 은신할 데가 없을까하고 찾아다녔다.
뒤편 창고 차 속에서 사람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려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문틈에다 대고 사람 얼어죽게 됐다고 소리쳤다.
안에서 문을 조금 삐겨 줘 기를 쓰고 올라갔다. 차안은 훈훈했다. 서너 시간이나 쪼그리고 앉았을까 못 간다는 기차가 김천 역에 도착해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 총 든 헌병과 미군MP가 기차에 탄 사람을 모두 내리게 해서 성분을 조사했다. 승객을 한쪽으로 제쳐놓는데 나는 예의 종군화가 증 때문에 그 차에 다시 탈 수 있었다.
기차는 대구 역 못 미쳐 지천 역에서 섰다. 앞이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지천서 대구는 지호지간이어서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기차를 타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가 않아 냉큼 내려서 논둑밭둑으로 걸어갔다.
대구초입 다리에 관장을 두른 청년들이 지켜서 오고가는 사람을 조사했다.
또 종군화가 증을 보이고 대구에 들어가 외종매(황우호) 집을 찾았다.
내외종매는 대구서 방직공장을 경영하고 잘 사는 터여서 얼마간 신세를 져도 괜찮을 집이었다. 이 집에 기식하고 있으면서 대구시내를 맴돌았다. 한날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설초(이종우)를 만났다. 설초는 깜짝 반가와 하면서『이순석씨도 여기와 있고 대구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종군화가 단 사무실도 있다』고 알려 줬다. 우선 종군화가 단 사무실부터 찾아갔다.
대구시내 중심가 빌딩2층에 10여평 되는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간판은 국방부 정훈국 선 전과 미술대라고 붙여 놓고 화가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었다.
화가들과의 연락은 현역 중위인 강경모씨가 맡아서 했다. 그의 직책은 미술대장이었다.
미술대에는 박득순·박영선·김중현·이순우·손일봉·김인승·이추태·이세득씨 등이 관여했다.
대구에서 나는 한솔 이효양씨 사랑채에 들어있던 공예가 하나 이순석씨를 만나 나도 한솔의 도움을 받았다.
한솔은 나에게『피난 와서 고생한다』며 그림이나 몇 장 그려달라고 했다.
한솔이 내 그림을 생활형편이 괜찮은 유지들에게 소개, 몇 점 팔아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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