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명령 안 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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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단은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전투단장 이병엽 대령이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장총장의 연락을 받은 사단장 안동순 준장이 부대로 나와 해산을 명령했다.
속수무책이었다.
혁명사 편찬위원회의 기록은 △사단의 출동시각을 상오5시 이후로 하고있으나 작전참모 오중령은 3시 출동명령, 3시40분 출발로 주장하고 있다.
오중령의 증언은『안 사단장이 부대출동을 막길래<가만히 계십시오. 다칩니다>라고 협박을 했더니 조용하더군요.
마침 육본에서 8기동기생 등이 지원을 나왔기에 안준장 감독을 부탁하고 연병장에 집결한 장병들을 출발시켰습니다.】
K씨(당시중령·독전대로 현장에 출동)의 증언.『안준장에게<전군의 영관장교가 모두 참여해 몇 사람이 방해해도 성사됩니다>라고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는데 유승원 중령이 오중령에게<우리가 붙잡고 있을 테니 부대를 동원해 나가라>고 했습니다.』
길재호씨(당시중령·독건대의 일원)의 후일담.『고 결심을 촉구했지만 계속 주저하더군요.』
공수단의 출동도 엇갈린다. 공식기록은『단장 박치옥 대령이나 대대장 김제민 중령은 장총장의 지시와 급파된 특전감 장호진 준장의 감시로 진퇴유곡에 빠져있었다.
박정희 소장이 도착해 출동지연을 힐책하자 출동하기에 이르렀다』고 썼다. 그러나 박치옥씨는 반론을 제기한다.『나는 총장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수 없는 입장에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출동대기태세를 갖추고 ×관구사령부에서 보내기로 한 차량을 기다렸습니다. 늦게야 드리쿼터가 와서 단원을 승차시키던 중 박소장과 마주쳤지요.
박소장에게 경호장교로 거지철 대위(후에 박대통령 경호실장)를 붙여줬죠.』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예정출동부대는 모두 서울로 진입했다. 마지막까지 진압부대로 태세를 바꿔 대기한 부대는 정보누설 사단인 ○사단뿐이었다. 이 사단은 진압군으로 출동까지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자 도리없이 혁명군이 되고 만다. 그 경위를 설명하는 이상국 사단장의 증언.『그 날밤 부대로 급히 돌아오니 불은 꺼져 있었으나 탄약 등이 이미 지급돼있었어요. 즉시 해산시키고 대기중일 때 16일 새벽1시30분쯤 장총장이 전화를 걸어 신임할 수 있는 병력으로 4개 소대를 편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2시30분, 장총장은 영등포 방면에서 해병대와 약간의 충돌이 있으니 빨리 하라는 독촉을 해왔어요. 약30분 후 ×관구사령관이<동족끼리 피를 흘릴 필요 없으니 참모총장 명이면 모르되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말고 총장명령도 나를 통해 받도록 하라>고 지시해왔어요.
그러나 또 30분 후 장총장이 부대편성이 됐으면 빨리 시청 앞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해오기에 권용성 대령에게 나머지 3개 소대 인솔을 지시하고 새벽4시40분 시청 앞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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