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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세계 최대의 국가를 탄생시킨 건 바로 이것 … 모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그림 1 렘브란트,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 1631년. 러시아에서 모피사업을 하는 상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1 의 주인공은 러시아에서 모피 사업을 하던 상인 니콜라스 루츠였다. 루츠는 러시아 북부지역으로부터 모피를 들여와 판매를 했는데 그다지 부유한 상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렘브란트는 1631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는데, 이주 후 받은 첫 의뢰였다.

새로 정착한 대도시에서 화가로서 명성을 쌓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던 렘브란트는 의뢰인이 내심 원했을 이미지대로 초상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의뢰인의 옷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 최고급 모피 의상을 의뢰인에게 입혔고, 주로 고관들을 그릴 때 쓰던 4분의 3 전신상 구도를 써서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 과연 렘브란트는 부르주아 초상화의 세계를 열었다는 평가에 어울릴 만한 화가였다.

모피는 왕족이 선호한 최고급 명품
주목할 부분은 중상주의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많은 수의 모피 수입상이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당시에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 수많은 모피 상인이 이익을 보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층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위상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중세 내내 모피 옷은 왕족과 귀족이 사랑하던 최고급 명품이었다.

특정한 모피, 예를 들어 어민(북방 족제비의 흰색 겨울털로 판사의 법복 장식에 사용)이나 배어(회색·흰색 무늬가 있는 다람쥐 털로 귀족의 외투 깃 장식에 사용)는 최상 신분층만 사용할 수 있다는 명령이 공포되기도 했고,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모피 종류를 지정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부유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신분을 사들이고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모피는 중산층에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모피에 대한 인기는 모피의 최대 공급지인 러시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 각지가 새 교역로를 통해 단일한 네트워크로 통합 돼가던 16세기에, 유라시아 면적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시베리아에서는 여러 부족들이 세계화의 흐름과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수렵과 채집, 순록 사육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1547년 자신을 차르라 칭하고 즉위한 이반 뇌제가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국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1580년대 초 대부호인 스트로가노프가(家)는 이반 뇌제에게 시베리아에서 민·관 합동으로 모피 무역을 하자고 제안했다. 차르가 이를 받아들이자 스트로가노프가는 러시아 남방지역으로부터 싸움에 능한 카자크(코사크)를 대규모로 고용해 시베리아 정복 작전을 시작했다.

그림 2 바실리 수리코프,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1895년.

그림 2는 카자크 부대가 시베리아 시비르칸국의 부대와 전투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가 총포로 무장하고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장면이다.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는 러시아 정교의 이콘을 휘날리면서 용맹스러운 부대원들이 이단 세력을 제압하는 모습을 장엄하게 묘사했다.

이후 카자크 부대는 시베리아 전역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들에게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병력과 무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인과 달리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있었다. 약 1세기 전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스페인 정복자들을 통해 들어온 천연두와 홍역 때문에 엄청난 사망률을 기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베리아인들도 이 질병에 노출돼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학살과 질병으로 인구가 격감하거나 아예 절멸한 부족이 줄을 이었다. 또한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동진(東進)은 계속됐다. 1640년대에 아무르 강에 도달했고, 1650년대에는 만주 헤이룽 강 지역에까지 진출해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청나라와 마찰을 빚었다. 조선에서 청의 요청에 따라 총수(銃手)들을 뽑아 나선(羅禪·Russia) 원정대를 파견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유럽~아시아~아메리카 잇는 제국
이미 1639년 태평양 연안에까지 도달했던 러시아의 정복부대는 동진을 계속해서 1740년대 알래스카에 정착지를 마련했고, 이어서 1810년에는 캘리포니아 북부에까지 도달했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유럽~아시아~아메리카를 잇는 초대형 제국이 탄생했다.

광대한 시베리아를 손에 넣은 러시아는 무엇보다도 모피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방안을 찾았다. 우선 모든 건강한 성인 남성에게 모피의 공납을 의무화했다. 과거에도 시베리아인들은 야사크(Yasak)라고 불리는 이 공납제도에 익숙해 있었다. 유력한 집단에 공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는 형태였다. 러시아의 통치하에 이제 시베리아인들은 모피를 러시아 왕실에 바치고 담배·도끼·칼 등을 받았다.

17세기에 매년 20만 장 이상의 모피가 공납됐다. 러시아 세수의 10%에 육박하는 가치였다. 술과 담배처럼 중독성이 강한 물품을 시베리아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대신 모피를 얻는 방법도 널리 쓰였다. 이 역시 러시아 정복자들이 모피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려고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이런 공납과 교역을 통해 시베리아는 세계적 네트워크의 일부가 됐다. 강압적이고 잔인한 세계화 과정이었다.

알래스카의 사정도 시베리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740년대부터 알래스카로 진출한 러시아 상인들은 원주민인 알류트족을 예속화하거나 교역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들이 모피를 계속 공급하도록 만들었다. 학살과 예속화, 질병의 창궐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서로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자 무역회사를 합병해 규모를 키웠고, 그럴수록 알류트족은 더 험한 지역에까지 들어가 모피 사냥을 해야만 했다.

그림 3 엠마누엘 노이체, ‘알래스카 매입 서명’, 1867년. 커다란 지구본을 사이에 두고 왼편의 미국 대표(4명)와 오른편 러시아 대표(3명)가 협상을 벌이고 있다.

알래스카, 유럽까지 모피 운송비 많이 들어
그러나 모피 공급처로서 알래스카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유럽까지 운송비가 많이 든다는 점이었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의 모피 자원을 공략하는 데에는 대서양을 건너 대륙의 동북쪽으로 가는 것이 더 유리했다. 영국의 허드슨만회사(Hudson’s Bay Company)와 같은 경쟁자와 비교해 러시아의 회사들은 밀리기 시작했다. 알래스카를 둘러싼 러시아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러시아는 1854~1856년 크림전쟁에서 영국·프랑스·터키와 싸웠으나 패배했다. 재정이 악화하고 군사력이 불충분한 상황에서 차르와 관리들은 드넓은 제국의 영토 중에서 경제적 가치가 작은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됐다. 알래스카에 유용한 자원이 얼마나 많은지 조사를 해보니 석탄 매장량은 적고, 고래잡이는 어렵고, 금 채굴도 신통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륙 탐사를 통해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모피의 양이 많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자원개발 전망이 나은 시베리아의 아무르 강 유역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867년 러시아와 미국 간에 역사적 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가 광대한 알래스카 땅을 720만 달러에 미국에 매각하는 내용이었다. 이 땅이 훗날 금·석유·천연가스가 가득한 자원의 보고로 드러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차르는 1에이커(약 4000㎡)당 불과 2센트라는 헐값에 이 땅을 넘겼다. 모피에서 시작된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여기서 마무리됐다. 결정적 오판으로 인해 러시아는 지금보다 더 큰 영토대국, 세 대륙을 잇는 유일한 영토대국이 될 기회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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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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