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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그의 파가니니는 스케일 크고 당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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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 27면

이탈리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니콜라 파가니니(1782~1840). [David d’Angers]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은 탁발한 그 기량이나 범상치 않은 이력에 견줘 볼 때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평가도 미흡했던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도 그를 화면에서 몇 번 단편적으로 대면했을 뿐, 연주회장에서 직접 그 연주와 만난 적은 없다. 근래 연주장을 자주 찾지 못한 게으름 탓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뜨겁고 구체적이다. 몇 번 안 되는 간접 대면이지만 그는 내게 무척 강렬하고 특이한 인상을 남겼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

그는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누구보다 잘 다루고 자신감이 넘치는 연주가인데 겉으로는 뻐기거나 으스대는 기색이라곤 전혀 볼 수 없고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연주가로 기억된다. 연주가가 무대에서 음악만 잘 들려주면 되지, 구태여 배우처럼 요란한 제스처를 구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첫눈에도 알아볼 만큼 빼어난 연주 기량을 가진 인물이 너무 표정이 없으니까 그게 도리어 강한 인상으로 남은 듯하다.

니콜로 파가니니의 ‘LE STREGHE(여자 마법사)’. 바이올린에 관한 한 천재 괴짜란 명성을 톡톡히 누렸던 작곡가의 걸작품으로 그의 작품 성향과 연주 기술의 주요 단서들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본래 악단과 협연하는 변주곡 양식이었으나 근래에는 피아노나 기타 반주의 듀엣으로 더 자주 연주된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이 작품이 파가니니 작품 중에서도 매력 덩어리란 걸 알면서도 선뜻 손을 대지 못하는 모양이다. 기교상 난삽한 점이 있고, 특히 체코의 전설이 된 바사 프리호다(1900~1960)의 완벽한 연주에 비교당하는 걸 꺼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위야 당사자 외에 알 수 없지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얼핏 살펴봐도 기교파라는 루지에로 리치나 살바토레 아카르도의 연주, 그리고 도전적인 몇몇 신예의 연주만 눈에 띈다.

바사 프리호다에 관해 웹사전에는 완벽 기교와 아름다운 소리결로 알려진 연주가란 짧은 해설이 있는데 실제 연주를 들어보면 유진 이자이 혹은 파가니니의 재래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솜씨가 놀랍다.

파가니니란 이름에는 기교적으로 난삽하고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는 인식이 있고 한편 기교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음악이 차갑고 냉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협주곡 1번 같은 인기 곡도 있지만 내가 정작 좋아하는 곡은 쇼팽의 편곡으로 피아노곡이 된 ‘베니스 카니발’이 있다. 바딤 레핀이 연주하는 핑거링을 곁들인 장난스러운 연주도 흥미를 돋워 주는데 이 음악에는 여행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여행 자체가 축제와도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양성식은 1999년께 ‘LE STREGHE’를 비롯, 몇 개의 소나타가 포함된 파가니니 곡 음반(작은 사진)을 냈는데 그의 선택이 내겐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단편적으로 귀동냥을 했지만 그에게서 루지에로 리치나 살바토레 아카르도 같은 기교파의 성향을 이미 엿봤기 때문이다. 그 음반은 내 예상을 적중시켰고 어느 의미에서는 더 높게 충족시켰다. 나는 그 연주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며칠 전 앰프의 먼지를 닦아내고 불을 지펴 오랜만에 그 연주를 다시 들어봤는데 지금 들어봐도 탁월한 기량은 여전했다. 그는 바사 프리호다에게 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연주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게 좀 더 큰 스케일로 좀 더 당당하게 파가니니를 연주했다. 그 점이 신선했다. 이 음반은 피아노 대신 기타 반주 버전인 것도 특색인데 뛰어난 기타 주자인 장승호를 발견한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파가니니가 한 시절 바이올린 활을 던져 버리고 기타 연주와 기타 작품 작곡에 몰입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음반에도 바이올린과 기타가 서로 이마를 맞대고 대화하는 ‘루카 소나타’ 12곡이 수록돼 있다. 이 음반은 파가니니의 상표처럼 돼 있는 바이올린 기법들이 일정 부분 그의 기타 취향에서 빌린 것이란 사실을 알려 준다. 이것은 오르간 연주 대가이던 바흐가 그의 여러 작품, 특히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같은 작품에 오르간곡의 기법을 훌륭하게 차용한 것과 유사하다.

‘LE STREGHE’에는 파가니니가 고안했거나 발전시킨 바이올린 기법들이 압축돼 있고 협주곡이나 소나타 등에 나타나는 낭만적 리리시즘의 노랫가락도 윤활유처럼 배치돼 있다. 피치카토나 핑거링, 중음주법, 도약의 보잉 등이 지금은 누구나 귀에 익은 수법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것들은 모범답안처럼 정제되고 난이도가 높은 것들이다. 양성식은 이 곡에서 그의 기교파적 특장을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는데 단순히 곡을 잘 소화하고 있다는 선을 넘어 난이도가 높아갈수록 소리가 더 날카로워지고 흐름이 자연스럽다. 바사 프리호다가 아름다운 소리결로 아기자기한 줄타기를 한다면 양성식은 시원하고 탄력 있는 소리로 보다 윤곽이 뚜렷한 음악을 들려준다.

물론 양성식의 레퍼토리는 모차르트·브람스·시벨리우스 등 다양하며 그 모든 연주에서 정통 연주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파가니니에서만 빛을 낸 건 결코 아니다. 다만 파가니니 음반에서 그가 드문 기교적 우월성을 확실히 각인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송영 작가 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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