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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실리콘밸리 에인절을 따라가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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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충영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중앙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경제학

우리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 우리는 기술선도형 창업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중국의 전방위 기술 추격에서 벗어나고 일본과 기술 경쟁을 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120만에 이르는 청년구직자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금 제조업은 고용 없는 성장 추세다. 다품종 기술 융·복합 시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품화하는 벤처 창업과 지속적 상업화가 창조경제 진흥의 열쇠다. 이 과정에서 실패의 위험을 떠안고 벤처기업에 대한 금융의 작동 여부가 앞으로 지속 가능 경제의 성패를 결정한다. 미국처럼 아이디어밖에 없는 젊은 두뇌에게 창업의 꿈을 도와주고 실패의 리스크를 안으면서 자기 책임 아래 지분투자를 하는 이른바 에인절투자도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1999년 필자는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고 약정한 구조개혁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한국으로 직접투자를 권유하는 국가 IR(투자유치설명회)에 참여하기 위해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금융이 신성장산업의 출현을 유도하고 금융을 통한 지식 전파가 수확체증까지 유발한다는 내생적 성장이론이 풍미하던 때였다. 실리콘밸리에서 에인절투자가들의 현장을 직접 찾아본 적이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30년 동안 전자공학 강의와 실험을 해왔던 저명 교수가 아이디어의 상품화 과정에 여생을 바치고 삶의 보람을 찾기로 했다는 것이다. 같은 나이 또래의 공인회계사와 중소기업 사장을 역임한 지인 두 사람과 함께 창업의 꿈을 키우고 있는 이들을 돕는 에인절투자가가 되었다. 그들의 일과는 매일 실리콘밸리의 창업 현장을 방문하고 경영지도와 함께 사업성 있는 프로젝트를 발굴해 지분투자 형태로 필요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5%에도 못 미치는 성공률이지만 나스닥 시장 상장에 성공하거나 인수합병을 통해 고수익을 보상받는 구조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90년대 후반 IMF 경제관리 시대에 벤처 창업 붐이 일어났다. 만연한 실업 사태에 대비한 일자리 창출의 목적이 컸다.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 주도 벤처지원기금과 민간 벤처캐피털 회사들이 등장해 벤처 창업에 마중물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늬만 벤처였던 좀비사업에 부실금융으로 실패의 사례가 훨씬 많았다.

 벤처기업들은 벤처캐피털 회사로부터 직접금융과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기술평가를 받고 그 보증으로 은행 대출을 받기도 한다. 지금은 대기업에 의한 창업투자회사도 점점 규모와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최근 동반성장위원회는 대기업이 자발적 협약으로 중소기업에 부품 및 소재 개발에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 주도 기술금융이 민간 벤처캐피털과 대기업 창업투자회사 등 민간 주도로 점점 전환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더욱 바람직한 자생적 에인절투자는 우리나라에서 불모지나 다름없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한국형 에인절투자가 11인이 중소기업청의 공인을 받았다. 이들이 투자하는 업체는 벤처기업으로 인증을 받고 정부로부터 매칭펀드의 금융지원까지 받을 수도 있다. 기술금융의 성공 열쇠는 옥석을 가려내는 기술력 평가 능력에 있다. 다기하고 중층융합화돼 가는 기술 속성을 국제적 비교우위 차원에서 심층 평가한 뒤 투자까지 결행하는 자생적 에인절들이 우리나라에도 적극 활성화돼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공 분야와 경상계열 직종에서 정년을 마치고 다양한 신기술을 평가하고 여유자금도 있는 잠재적 에인절의 인력풀이 많다. 이들이 벤처기업을 돕고 시중은행까지 진출하면 담보 위주의 시중은행 대출 관행도 기술력 바탕의 기술금융으로 크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벤처의 창업과 지속적 성장을 위한 인재 공급도 선결돼야 한다. 대학에서도 이공계와 경상계열의 교과 과정에서 공통의 과목을 이수케 해 융·복합 신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인간자본을 배출해야 한다. 21세기 우리 경제는 신기술에 의한 신상품의 공급, 인간의 건강 증진을 위한 바이오, 지구환경과 에너지 문제도 신기술력으로 해결하는 테크노피아를 지향해야 한다. 개인의 창의성으로 꽃피우는 테크노피아는 관 주도가 아니라 민간의 자생적 기술금융에 의한 벤처 창업의 활성화에서 가능하다. 실리콘밸리 에인절들은 창업자의 기술력 못지않게 도전 열정과 정직성을 더욱 높이 평가해 투자를 결정한다. 미국의 독립 이후 서부 개척의 프런티어 정신이 벤처와 에인절 출현의 사회문화적 풍토가 되었다. 전국 17개 지역에서 추진되는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벤처 창업과 민간 주도 기술금융이 확실하게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안충영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중앙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