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어떤 出土(출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나희덕(1966∼ ), ‘어떤 出土(출토)’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늙은 호박이 내민 젖을 오글오글 빨고 있는 벌레들이라니! 젖살 올라 통통하게 살 찐 벌레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쟁쟁쟁 뜨겁게 달구지 않았다면 여름은 빈한을 면치 못하였으리. 여름이 가난한데 어찌 가을인들 식탁이 풍요롭겠는가. 벌레들 호박을 양식으로 삼지 않았다면 그녀의 종족은 아주 멸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것. 방치 된 젖이 썩어 씨마저 썩지 말란 법 없지 않으니 말이다. 이를 두고 相生이라 하던가.

이재무<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