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파일] 97세 거장, 올리베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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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 스릴러 '혈의 누'를 내놓은 김대승(38) 감독은 임권택(69) 감독 밑에서 7년 동안 조감독 생활을 했다. '서편제'(1993년)부터 '춘향뎐'(99년)까지 임 감독 밑에서 일했던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하루하루가 경이였다"고 말했다. 짧은 몇 컷 안에 삶을 꿰뚫는 장면을 빚어내는 스승을 보고 수없이 좌절했으나 그 절망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 냈다고 감히 인정한다. '번지점프를 하다''혈의 누'를 성공시키며 충무로에 뿌리를 내린 그는 요즘도 스승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숨도 크게 쉴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올해 '천년학'으로 100번째 영화에 도전하는 임 감독. '충무로의 전설'로 남을 만한 그도 포르투갈의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에 비하면 '젊은이'다. 올리베이라는 올해 97세. 망백(望百.91세)을 훨씬 넘긴 그는 올 전주영화제에 소개된 '제5제국'(2004년) 등을 만들며 '노병은 죽지 않는다'를 드러내고 있다. 지구촌 최고령 현역 감독이다.

물론 세월이 원숙의 동의어는 아니다. 그러나 올리베이라는 다르다. 90년대 이후 거의 해마다 신작을 발표하고, 또 인생과 자연을 통찰해 온 그는 '노장''거장'의 사전적 의미와 꼭 맞아떨어진다.

올리베이라의 '불안'(98년)이 10일 서울 필름포럼(구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된다. '영화의 올림포스'로 불리며 20세기를 통째로 지켜보았던 그가 한국에서 첫선을 보이는 것. 우연히도 '불안'의 주제는 불멸과 죽음. 80세의 저명 학자가 역시 60세의 성공한 아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으면 지금 죽어버려라"고 자살을 종용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유한한 삶, 운명적 사랑 등을 동화적 상상력을 곁들이며 너무나 차분하게, 또 지극히 나직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피가 끓는 젊은이라면 '불안'을 보면서 '졸음'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대학로 정통연극 한 편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처럼 노년의 의미를 진득하게 파고들기 때문. 호탕도 웃음도, 배꼽 잡는 유머도 없이 삶의 언저리를, 그리고 죽음의 그늘을 응시한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라면….

상영관도 영화와 어울린다. 휘황찬란한 멀티플렉스가 아니다. 극장 주변에는 1500원짜리 국밥과 숭덩숭덩 자른 돼지고기 냄새가 자욱이 깔려 있다. 세태를 좇는 기획영화에 물렸다면 한번 찾아가시길…. 그곳엔 서울의 나이가 오래된 연극처럼 스며 있다. 감독은 "영화는 연극을 포착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말해 왔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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