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7)제76화 화맥인맥(26)|월전 장우성|가친 회갑기념 화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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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아버님(장수영) 회갑을 맞아 그해 (l942년)에 기념으로 화첩을 해 드렸다.
내가 화가일 뿐 아니라 그 시절에는 어른을 위해 기념될 만한 일로 화첩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지금은 유명 서화가에게 화첩에 그림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지만 그 무렵은 대가들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선선히 해주었다. 폐백이라야 그저 인삼 한갑 아니면 술 한병, 쇠고기 두어 근이 고작이었다.
나의 경우는 내가 받기는 아버지 회갑 때가 처음이었지만 남에게 해주는 일이 더 많았다. 화첩 받기도 품앗이와 같아서 나를 해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요청할 때 반드시 답 화를 해야 했다.
화첩은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아버지회갑 때 쓰려고 일부러 사 온 것이다.
이 화첩을 가지고 맨 먼저 찾아간 곳이 위창(오세창) 댁이다.
화첩에는 글씨를 먼저 쓰는 게 상례일 뿐 아니라 그때 우리나라 서화가로는 위창 어른이 최고 연장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창 께『삼다구여』(삼다=다폭·다수·다남, 구여=여산·여부·여강·여능·여천지방지·여월지항·여일지승·여남산지수·여송백지무)란 글씨를 받고는 설송(최규상)의 제 첨을 받았다.
동문당 최태호 사장의 춘부장인 설송은 그때 전주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내왕이 잦았다. 서예와 사군자에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설송은 전서로「수고무강」이라고 쓰고,「축 일재 선생 육십일수, 설송제첨」이라 붙여 낙관을 해주었다.
그림은 맨 먼저 이당(김은호)선생께서 받았다. 신선도를 그리고『수성견』이란 화제를 붙였다.
다음이 영운장(김용진)-. 천도를 그리고『대길상』이란 화제를 썼다.
모두 임오년(1942년)가을에 받은 것이지만 순서대로 말하면 영운장 다음에 의재(허백련) 어른께 부탁했다.
의재 선생은 소나무 둘을 그리고『쌍송공수』라는 화제를 달았다.
심향(박승무)어른은 산에 신선고장처럼 해와 달을 함께 그리고『천보구여』라고 썼다
춘곡(고희동)선생은 괴석과 꽃을 그리고『기석수천고 호화개사시』라고 화 제했다.
심산(노수현)선생은 자목련 두 그루를 그리고『부귀』라 써 주었다.
소정(변관식)선생은 높은 바위산에 소나무 두 그루와 학 두 마리가 나는 그림을 화제 없이 그려 주었다.
이상 열 분의 그림·글씨를 받고 난 2년 후에 우연히 선전의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한 가등송림이 여 주에 와서 추가로 가 등에게서도 한 점 받았다.
가등은 여주읍의 일본여관에 묵고 있었는데 내가 마침 집에서 찹쌀떡을 있기에 싸 가지고가 함께 먹으면서 선전이야기를 나누며 화첩 그림을 부탁해 받았다.
가등은 금강산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아호와 같은「소림인」이란 사인을 해 주었다.
해방 직후에는 효자동 집으로 소전(손재형)을 찾아가 화첩을 맡기며 다음에 청전(이상범) 선생그림을 받으려고 하니 빨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소 전은 화첩을 놓아두고 맨 날 해주지 해 주지하고는 몇 해를 넘겼다.
기다리다가 소 전을 찾아가 다른 사람부터 받겠으니 화첩을 되돌려 달라고 했다.
소 전은 서재에 들어갔다 한참 후에 나와서 화첩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찾아 보낼 터이니 내려가 있으라고 했다.
며칠 후에 소 전에게서 온 집안을 이잡 듯이 다 뒤져도 화첩이 안 나오더라고 퍽 미안해하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렇다고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잊어버리면 큰일이니 유념해서 잘 찾아보라고 엄포 겸해 단단히 부탁해 놓고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다가 해를 넘기고 6·25를 당해 화첩타령은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환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소 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소 전은 다짜고짜로『그 화첩 표지에 무어라고 썼지?』하고 물었다.
내가「수고무강」이라고 썼다니까『그럼 맞는구먼…』하고 화첩을 찾았다고 큰소리 쳤다.
전화를 끊고 이내 올라가 봤더니 화첩이 광주에서 굴러다니다가 다시 소전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카이제르」의 것은「카이제르」에게』란 말처럼 그 화첩이 내수 중에 다시 들어와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는 화첩을 찾고 추가로 운보(김기창)에게서도 그림을 받았다. 운 보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부처를 연화대에 앉히고「호승자필쟁 탐영자필욕」이란 화제를 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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