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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기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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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삼행시 짓기는 서민 동네에 내려오는 역사가 오래된 말놀이다. 이름이나 단어의 머리글자 서넛을 운으로 띄워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무조건 말만 돼서는 족보에 오르기 어렵다. 말이 말을 잡는 뼈 있는 속내가 관건이다. 이를테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국민 속을 속시원하게 긁어준 이런 사행시 한 수가 본보기라고나 할까. '국:국민을 우롱하고, 회:회견장에서 잘난 척하며, 의:의견을 무시하고, 원:원성을 받으면 받을수록 선망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삼행시는 한국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유행을 탔다. 제대로 된 말길이 막혔을 때나 하도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을 때 배설하듯 터져나왔다. 1987년 6월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이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을 두고 나온 삼행시도 꽤 가작이었다. '노:노가립니다. 태:태평양에서 잡아왔죠. 우:우습죠?'

끊임없는 거짓말로 국민을 우롱하던'노가리 노태우'는 전두환과 또 다른 의미에서 강적이었다. 그런 그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6.29선언을 토해내기까지 전국을 뒤흔든 6월 항쟁은 뜨겁고 진한 추억을 우리 가슴에 남겼다. 그때 거리로, 광장으로 사람을 불러모은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해사한 청년의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몸은 동료 학생에게 안기듯 옆으로 기울었다. 6월 9일 오후 5시쯤 스무 살 대학생 이한열군은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며 두려움 없이 행진하다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쓰러졌다. 쓰러진 이한열은 죽음이 삶이었음을 보여줬다. 그의 아름다운 희생을 딛고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향한 힘든 발자국 하나를 뗐고 지금 여기까지 걸어왔다.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9일 문을 여는 이한열기념관은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핀 한 청년의 넋을 모신 집이다. 국민 모금으로 마련한 첫 민주열사 기념관으로도 뜻이 깊다. 18년 전 그가 쓰러질 때 입었던 옷과 운동화가 핏자국이 선명한 채 전시된다. 고인이 남긴 시 '그대 가는가/어딜 가는가/그대 등 뒤에 내리깔린 쇠사슬을/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도 벽에 걸렸다. 그대 뜬 눈으로 떠난 이 땅에 살아남은 이가 삼행시를 바친다.'이한열은, 한국인의, 열락이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