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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웃다 80年] 21. 장미 악극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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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1971년 TV 코미디 프로에서 연기하고 있는 필자.

'장미 악극단'은 유명한 단체였다. 배우라면 누구나 거기서 일하기를 꿈 꿀 만했다. 서울 을지로 6가의 계림극장에서 올린 장미 악극단의 악극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나는 무작정 분장실로 쳐들어갔다. 한창 이름을 날리던 주연 배우 김진규(1998년 작고)씨가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성춘향''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삼포 가는 길'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톱스타가 된 인물이다. 극단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소품을 담당하던 단원에게 매달렸다. "희극은 자신 있어요.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물러설 기색이 없자 그는 단장에게 데려갔다. "음, 정 오갈 데가 없으면 여기에 있어라." 몇 가지 테스트 후 입단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내게 배역을 줄 리 없었다. 다시 심부름부터 시작했다. 판자로 만든 극장 무대에서 잠을 잤다. 야식비로 나오는 몇 푼이 수입의 전부였다. 연구생들은 야식비를 아꼈다가 남대문시장까지 걸어가서 국밥을 사먹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국밥은 값도 싸고 양도 많았다. 한끼 값으로 두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선배들은 순발력이 있다며 내게 프롬프터를 맡겼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공연 시간이 코 앞에 닥쳤다. 그런데 조연급 희극 배우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없어선 안될 감초역, 공연은 김빠진 맥주가 될 판이었다.

단원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때 단장이 말했다. "야! 삼룡이, 자네 대사를 다 외우고 있지?" 물론이었다. 프롬프터에겐 모든 배역의 대사를 달달 외는 게 일이었다. "가서 준비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팠다. 기회였다. 극장 바닥에 쪼그려 새우잠을 자면서도 숱하게 떠올렸던 꿈. '드디어 장미 악극단의 무대에 서는구나.'

막이 오르고 무대에 나갔다. 떨렸다. 심장 고동이 멈추질 않았다. 그래도 대사는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바로 발음이었다.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고등 과정을 마친 나는 우리말 발음이 어눌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대사라도 내가 하면 맛이 달랐다. 왠지 엉성하고 어설펐다. 나와 대사를 주고 받던 배우들은 꽤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객석의 반응은 달랐다. 어벌쩡한 내 연기에 관객들은 자지러졌다. 내가 대사만 뱉어도 폭소가 터졌다. 흐늘흐늘한 몸짓이 그렇게 우스운지 객석이 뒤집어지는 듯 했다. "아유 배야, 아유 배야." 배를 움켜쥔 채 껑충껑충 뛰는 사람들도 보였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막이 내렸고 배우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했다. 그런데 주연 배우보다 내게 더 큰 박수와 환호성이 떨어졌다.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무대에서 느끼는 첫 전율이었다.

이후 내겐 고정 배역이 떨어졌다. 극단들 사이에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장미 악극단에 배삼룡이란 희극 배우가 있대. 그런데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는구먼."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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