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위기 기술신보를 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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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에 지원할 신용보증 재원이 바닥날 위기에 처한 기술신용보증기금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비상수단 동원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2일 재정경제부와 신용보증기금, 기보 등에 따르면 정부는 신용보증기금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은행들이 신보에 지원할 출연금을 기보에 투입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은행들은 현재 매달 중소기업 보증대출 평균 잔액의 0.2%를 신보에, 0.1%를 기보에 각각 내놓고 있는데 이 돈을 모두 기보에 몰아 주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구상대로라면 기보에 대한 은행 출연금은 매달 20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크게 늘어나고, 신보에 대한 출연금은 없어지게 된다.

이에 앞서 재경부는 지난달 말 시중은행 부행장 회의를 열어 은행들이 내년에 기보에 출연할 돈을 1년 앞당겨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2800억원가량으로 추정되는 이 돈이 공급되면 기보의 재원 부족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보는 2001년 벤처기업들이 발행한 1조8000억원 규모의 프라이머리 자산유동화증권(CBO)에 보증을 섰으나 발행 기업들이 부실해져 돈을 갚지 못하는 바람에 대신 빚을 갚아 주느라 올해 3500여억원의 재원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추세라면 하반기엔 재원이 고갈돼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보증이 차질을 빚게 될 상황이다.

금융권에선 정부가 문제를 방치하다 뒤늦게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프라이머리 CBO 문제가 지난해 초부터 불거져 기보 재원 고갈이 뻔히 예상됐는데도 예산의 추가 투입 등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손쉽게 돈을 조달하는 방법만 찾고 있다는 지적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내년에 낼 돈을 외상으로 미리 달라는 구멍가게식 운영으로 보증기관을 운영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벤처기업을 지원한 정책 실패의 후유증을 은행들이 떠안게 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신보 노조도 "은행 출연금을 모두 기보에 몰아 줄 경우 신보 예산과 보증금액의 비율이 현재 12.5배에서 연말 18.3배로 높아져 동반 부실화와 신용보증 시스템의 붕괴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나현철 기자

*** 기술신보 왜 이리 됐나

벤처 자산유동화증권 보증 섰다가 무더기로 안 갚아 1조원 넘게 물려

기술신용보증기금의 재원 고갈 위기를 불러온 주범은 2001년 집중적으로 발행된 벤처기업 프라이머리 자산유동화증권(CBO)이다.

벤처 위기론이 고조되면서 벤처기업의 자금난이 심해지자 정부의 지원 아래 증권사들이 이들 기업이 발행한 전환사채를 담보로 해 발행한 채권이 프라이머리 CBO다. 2001년 5월부터 12월까지 3000억원 안팎의 규모로 모두 다섯 차례 발행됐다.

참여한 벤처기업들의 신용도가 낮아 그대로는 시장에서 소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보가 보증 역할을 맡았다. 벤처기업들이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대신 물어주기로 한 것이다. 발행 당시부터 벤처발(發) 경제 충격을 걱정한 정부가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3년 만기가 지난 2004년 이 같은 우려는 현실화했다. 그동안 불어난 이자 4000억원을 포함한 2조2000억원의 원리금 중 벤처기업들이 제대로 상환한 금액은 30% 남짓한 7047억원에 불과했다.

회사가 사라지거나 부도 상태여서 기보가 대신 물어준 금액이 7525억원에 달했다.

당장 갚을 능력은 없지만 발행회사가 남아 있는 7550억원은 기보가 보증을 서 시중은행들로부터 1년짜리 대출을 알선해 주는 형식으로 만기 연장됐다.

지난달부터 만기가 돌아오기 시작한 이 돈도 제대로 회수될지 의문이어서 기보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금융권에선 7550원 중 기보가 회수할 수 있는 돈의 비율이 최악의 경우 절반에 못 미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낙관적으로 잡아도 만기 상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불량 채권'인 이상 보증 채권이 부도가 나 대신 물어주는 보증사고율이 평소(11.7%)보다 배 이상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허술한 보증시스템이 재원 고갈의 한 요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같은 업무를 하는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사고율은 기보의 절반 수준인 6.6% 선이기 때문이다.

기보는 최근 감사원에 제출한 '자금수지 전망'에서 올해 연간 수입이 1조1658억원에 그치는 반면 빚을 대신 갚아 주는 대위변제 등에 필요한 지출은 1조6062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에 쓰다 남은 이월액까지 끌어 써도 연말까지 3594억원이 부족하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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