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 살린 무대 르네상스 느낌 물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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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30면

오늘날 좋은 오페라 공연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출력이다. 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19세기 전반기까지의 풍토나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에 주목한 다음 시기와 비교하면 극적인 완성도와 새로운 드라마투르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셈이다. 경험이 풍부한 관객들은 가수와 지휘자의 이름만큼이나 누가 연출한 프로덕션인가를 고려해서 오페라하우스에 간다. 오페라를 창안한 16세기 말의 피렌체 지식인들의 ‘음악과 극의 균형’이라는 이상에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국립오페라단 ‘로미오와 줄리엣’

엘라이저 모신스키는 특히 영어권 관객들이 신뢰하는 최고의 연출가 중 한 사람이다. 1975년 로열 오페라에서 첫 연출을 시작한 이래 오페라와 연극을 오가며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무대와 의상, 조명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편이므로 실험적 연출을 기피하는 보수성향의 관객과 무대 위의 미술 효과에 주목하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대가인데, 이런 비싼 연출가를 불러올 수 있는 국내 단체는 국립 오페라단밖에 없다.

모신스키는 ‘로미오와 줄리엣’(10월 2~5일 예술의 전당)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베로나라는 원작의 배경을 충실히 살리면서 새로운 포인트를 강조했다. 액자형 프로시니엄을 원근법적으로 겹겹이 배치한 무대는 르네상스 시대임을 보여준다. 원근법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비롯되어 당대의 무대에도 구현된 바 있다. 게다가 프로시니엄을 이용한 것은 극장에 와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림을 사용한 몇몇 배경은 베로나라는 공간적 정보도 확인시켜 주었다.

조명을 시종 깊은 푸른색으로 한 것은 모신스키가 이 오페라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두 주인공의 현학적이고 상징적인 대사는 에로틱한 해석을 유발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모신스키는 적어도 이들끼리는 ‘성스러운 사랑’을 체험 중이라고 본 것이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진짜 사랑에 빠지면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다른 이들의 사랑과는 격이 다른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푸른색은 바로 성모마리아의 상징이다. 한편으로 푸른색은 밤을 나타낸다. 오페라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저녁이거나 깊은 밤이거나 새벽, 아니면 적어도 자연 조명이 거의 없는 실내에서 벌어진다. 예외는 야외에서 벌어진 두 집안간의 시비와 결투 장면뿐이다. 모신스키는 여기에서만 베로나 광장의 밝은 배경그림을 사용해 블루 톤을 희석시켰다. 사실 같은 색조를 두 시간 반이나 이어간 것은 조금 지루했다. 조도를 뚜렷하게 조절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상징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에로틱한 면모를 배제하고 진지한 연극적 연기에 머문 것도 예상하지 못한 잔재미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막과 장을 표시하지 않고 장소와 사건 중심으로 표시한 것은 효과적이었다. 사실은 똑같은데도 흐름이 원활하게 느껴졌고 3막 중간에 인터미션을 갖는 것에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A팀 캐스팅인 프란체스코 데무로(로미오)와 이리나 룽구(줄리엣)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가수들이다. 최근 활약상이 돋보이는 데무로의 경우 보기 드문 정통 리리코로서 유려한 울림이 인상적이었다. 감정의 굴곡을 넘나드는 유연함이나 연기의 자연스러움이 보태졌으면 더 좋았겠다.

이리나 룽구는 아름다운 외모와 어두운 고품격 음색이 특기인데, 전반부에서는 의도적으로 밝게 불러서 사랑에 빠진 소녀답게, 후반부에서는 원래의 어두운 음색으로 줄리엣의 비극을 효과적으로 소화했다. 다만 능숙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아니어서 왈츠풍의 아리아 ‘꿈속에 살고 싶어’에서는 화사한 맛이 덜 살아났다.

국립오페라단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이런 멋지고 국제적으로 통용될 만한 프로덕션을 외국 팀 하나와 국내 팀 하나의 주역 캐스팅으로 끝내고 언제 다시 무대에 올릴지 기약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시즌제를 채택하든지 해서 더 많은 레퍼토리를 더 여러 번 공연해 국내 제작진과 가수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글 유형종 클래식평론가 divino@hanmail.net, 사진 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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