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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예술의 여신과 한판 붙다 … 현실인 듯, 상상인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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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독특한 소설 ?미스터 폭스?를 쓴 영국 작가 헬렌 오이예미. 세계 문단에서 주목 받는 작가로 떠오른 그는 “교훈적인 소설보다 재미를 추구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스터 폭스,
꼬리치고 도망친 남자
헬렌 오이예미 지음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436쪽, 1만4800원

소설 생태계는 총성 없는 전쟁터다. 성공을 좇는 작가, 대박을 노리는 출판사, 깐깐한 평단이 뒤엉킨다. 겉은 평온한 것 같지만 속은 숨가쁘다. 작가 앞에 놓인 과제는 언제나 벅차다. 잘 팔려야 하고 평가도 좋아야 한다. 상업적·미학적 도전이다. 더 괴로운 대목은 이전 작가들이 쓰지 않은 글감, 시도해보지 않은 형식 실험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여성작가 헬렌 오이예미(30)의 선택은 독특하다. 이것도 역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네 번째 장편인 『미스터 폭스』에서 작심한 듯 기존의 소설문법을 철저히 파괴한다.

 소설은 남자 주인공인 소설가 미스터 폭스가 작업실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교향악을 들으며 좋은 글감, 멋진 문장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글감과 문장 대신 나타난 것은 묘령의 여인 메리 폭스. 메리는 폭스의 아내 대프니가 2층에서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도 대뜸 스커트 자락을 아슬아슬하게 들어올려 도발한다.

 화끈한 장면이라도 연출하려는 것일까. 메리는 예술의 여신인 뮤즈임이 곧 밝혀진다. 폭스 소설에서 항상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살해한다며 문제를 제기하자 둘 사이에 티격태격 말싸움이 벌어진다. 상상의 존재가 나타나는 판타지, 좋은 소설은 어떤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는 일종의 메타 소설이다.

 말싸움은 진검 승부로 확대된다. 누가 더 참신하고 수준 높은 소설을 쓸 수 있는지 대결을 벌인다. 둘은 번갈아 가며 짧은 이야기 하나씩을 선보인다. 메리가 먼저 어처구니 없는 여성 살해극을 선보여 폭스 소설의 허점을 은근히 비꼬자 폭스는 메리를 형편 없는 작가 지망생으로 설정한 이야기를 내놓는 식이다. 『미스터 폭스』는 그래서 수 많은 에피소드, 작은 소설이 연쇄를 이루는 작품이다.

  오이예미는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12세기 프랑스 작가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작품 일부를 그대로 갖다 쓰는가 하면 편지글 공방만으로 한동안 소설을 끌고 나간다. 무엇보다 작품 전체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프랑스의 잔혹 동화 ‘푸른 수염’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오이예미는 지금까지 다섯 편의 장편을 썼다. 열여덟에 발표한 첫 작품 『이카루스 소녀』를 뉴욕타임스가 서평했을 만큼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 실험적인 신인만은 아닌 것이다.

 그는 12일까지 열리는 ‘2014 파주 북소리 축제’ 참석차 한국에 들어와 있다. “플롯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각 에피소드의 의미와 재미에 주목해달라는 주문이다. “순서대로 읽지 않고 중간부터 내키는 대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했다. “독자들이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다시 읽는 책, 언제든 다시 찾는 오솔길(trail) 같은 책이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의 말마따나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려는 욕망을 잠시 뒤로 하면 소설은 흥미롭다. 대립적인 남녀의 재치문답이 웃음을 자아낸다. 뒤틀리기 쉬운 남녀 관계의 은유로도 읽힌다. 오이예미는 “교훈을 얻으려는 건 사절이다. 재미있게 읽어달라”고 했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한국 드라마에 빠진 소설가

헬렌 오이예미는 한류 팬이다. “K팝도 즐겨 듣지만 특히 K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여름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지내 한국 방문이 한 달 전부터 설랬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를 묻자 ‘Rooftop Prince’을 꼽았다. 박유천이 출연한 ‘옥탑방 왕세자’다. 좋아하는 이유가 허를 찔렀다. “어떤 이상한 일도 벌어질 수 있고, 등장 인물이 어떤 이상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어 끌린다”고 했다. 안방인 한국에서 때로 ‘막장’으로 몰리기도 하는 한국 드라마가 매력적으로 비친 것이다.

그런 취향은 『미스터 폭스』에서도 읽힌다. 여성 주인공 메리 폭스는 폭력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예측 불허 캐릭터다. 성격이 자주 바뀌는 한국 막장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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