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노무현·부시 빅딜'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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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한.미 관계에 대한 일본 외무차관의 볼멘소리가 다음달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의 의제 설정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미국이 한국을 믿지 못하니 일본이 북한에 관한 정보를 한국과 공유할 수 없다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朗) 외무차관의 말은 한.미.일 정보 공조에서 한국이 소외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한국의 왕따가 정보뿐일까 싶다.

그는 또 말했다. "6자회담에서 미국과 일본은 오른편에 있고, 중국과 북한은 왼편에 있는데 한국은 중간에서 왼쪽으로 가는 것 같다." 객관적인 사실이야 어떻든 미국과 일본이 6자회담에서의 한국의 입장을 북한.중국의 입장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북핵 해결에 필수적인 한.미.일 공조는 불가능하다.

청와대는 야치가 한.미 관계의 민감한 부분에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낸 데 대해 주제넘은 일이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청와대로서는 있을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외교상의 관례와 예의를 모를 리 없는 일본 최고위 외교관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미국과 일본은 북핵 문제에서 한국이 한.미.일 공조와는 거리가 먼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개인 관계에서나 국가 관계에서 객관적인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북핵에 대한 한.미.일의 인식이 전적으로 같을 수 없다. 북핵 해결에서 한국의 대전제는 전쟁 방지인데 반해 미국의 그것은 북한의 핵 보유 불용(不容)이다. 그러나 전쟁 방지와 핵 불용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북한이 핵무장을 강행하고 핵무기를 테러 집단과 불량 국가에 수출까지 한다면 북한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한국의 대북 정책의 대전제인 전쟁 방지를 위해서도 북한의 핵무장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한국과 미국의 이익의 접점이요, 대북 공조의 출발점이다.

미국은 2002년 4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인기가 수직 상승하자 매우 놀랐다. 그때 국무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는 아시아협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은 한국의 차세대 지도자가 한국에서의 미국의 전통적 역할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한.미 관계 성격을 다시 규정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다.

켈리와 미국의 많은 한반도 전문가가 걱정했던 대로 노무현 정부는 한.미 관계의 성격과 미국의 역할을 "자주적으로" 다시 규정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주한미군이 한반도 밖에서 일어나는 분쟁에도 개입한다는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하고, 한국은 한.미.일의 남방 3각 동맹의 족쇄를 벗고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남북 관계에서는 한.미 또는 한.미.일 공조보다 민족 공조에 더 무게를 둔다는 인상을 주었다. 중국까지 한국의 지나친 친북 자세 때문에 북한을 상대로 중재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한다는 말이 들린다.

한.미 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시기에 일본 고위 관리가 한국으로 하여금 한.미 관계를 진지하게 되돌아볼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제는 북핵일 것이다. 그러나 한.미 공조, 더 크게는 한.미.일 공조 없이는 북핵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에 빅딜이 필요하다.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 노 대통령은 많은 오해를 낳고 민족적 로맨티시즘으로 흐른 자주적인 대미 정책을 실용주의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동북아 균형자론과 주한미군의 유연한 역할, 작전계획 5029에 대한 반대가 그것들이다. 그 대신 부시한테서는 북한에 6자회담 참석의 확실한 명분을 주어 북핵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이다.

빅딜의 바탕은 한.미 간 신뢰다. 북한도 입으로는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지만 미국이 불신하는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료와 쌀과 개성공단과 금강산에서 나오는 수입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상회담 준비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을 찾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