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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최고야…"<89>김장김치 제 맛내는 황천육젓 광천읍 옹암리 독배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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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보시기 한보시기 정성들여 김장독에 차곡차곡 쌓이는 월동 밑반찬 보쌈김치, 김장김치의 제맛은 바로 간질(간맞추기)에 달려있다.
김치의 간질은 뭐라 해도 새우젓이 제격. 김치를 담근지 3∼4일뒤에 맑게 가라앉힌 새우젓국을 부어 서늘한 곳에서 익힌다.
새우젓국이라면 광천육젓이 최상품-.
6월에 잡아다 담근 것이라 하여 육젓이라 불리는 광천육젓은 도드라진 새우발에 볼그레한 살이 통통히 오른 담박한 맛이 일품이다.
5월에 잡은 오젓이나 10월에 잡은 추젓, 겨울철에 잡은 동백화젓으로 그 모양새나 맛을 비길 수조차 없는 육젓은 김장김치의 젓갈감으로 단단히 한 몫을 한다.
보령 대천으로 빠지는 아스팔트길을 지나다 보면 새우젓의 본향 광천을 지난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독배마을.
독배마을은 그 옛날 마포어물포구에 비기던 새우젓 마을이다.
마을포구엔 길 양쪽으로 새우젓 담은 드럼통이 맛의 연륜을 전해주듯 군데군데 녹슬고 껍질이 벗겨진 채 즐비하게 널려있다.
마을주민수는 2백50가구 1천1백여명.
90%이상이 젓가공을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호당 연간수입은 2백50만원 안팎. 자본이 약하다보니 상인들로부터 물량을 받아다 간질을 해주고 노임을 받거나 담근 것을 보관해 주고 보관료를 받는다.
『광천독배 시집 못간 연애팔자란 말도 못 들었시유. 한참 경기가 날릴 때는 시악시들이 독배로 시집 못 와서 안달을 했다는 것이지유. 그 동안 돈푼이나 모은 사람은 다 나가고 이젠 고만고만한 사람들만 남았다니께유.』
이장 박정일씨(43)는 본관사람들은 대부분 돈 모아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막연히 돈벌이를 찾아 모여든 외지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했다.
박씨의 말로는 충청도에서는 한번 부자가 된 이는 반드시 망한다는 말이 있어 여유만 생기면 타지로 나가 맛갈스런 새우젓의 명성만 남아있을 뿐 새우젓 냄새 전 옛사람들은 하나 둘 이 고장을 떠난다고 한다.
20∼30년 전 각종 어물을 산더미같이 실은 안강망 어선들이 포구에 부산할 때만해도 마을전체가 풍요함에 들떴지만 이제 그런 영화는 토박이 주민들의 기억에나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그 흔한 개량주택 한 채 찾아보기 힘들고 마을의 성씨만도 50가지를 헤아려 순수토박이는 가뭄에 콩나듯 드물다.
『광천장날이 유명허다고 허지유. 그것도 다 광천독배 어물땜신디 이자는 마음이 허전허니께 장도 옛날 같지 않구만유.』
이 마을 박근목씨(53)는 일제말엽 새우젓동이를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던 새우젓장수도 이 마을에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현재 이 마을에서 가공되는 새우젓 물량은 전국수요의 60∼70%. 한 때 90%를 넘던 시절도 있었지만 교통수단의 발달과 저장법의 개량, 김장수요의 절감에 밀려 물량이 줄었다.
독배마을의 한해 가공량은 줄잡아 2만4천 드럼(6천t). 잡류가 섞인 하품은 드럼당 7만원선에서 육젓 최상품은 60만원까지 홋가한다.
이 마을에서 가공하는 새우젓은 경기도 위도 앞바다와 전남 흑산도근해에 형성된 어자 에서 어획한 것을 인천·목포에서 수송해온다.
생산지도 아닌 광천독배가 새우젓으로 유명한 것은 이곳 주민들의 간질솜씨와 보관법 때문.
특히 젓갈이 쉬 삭지 않도록 보관하는 지온(지온)저장법은 이 마을에서 개발됐다.
젓갈이 기온차가 심한 외기온도에 접하지 않도록 굴속 깊숙이 저장해 섭씨 13∼15도 온도를 유지하도록 보관하는 것이 기온저장법.
17년 전 이 마을 윤만길씨(70)가 폐광된 금광갱속에 젓갈통을 시험삼아 넣어두었다가 몇 개월 후 꺼내보니 맛이 변하지 않고 삭지 않은데 착안했다.
『원래 이 고장엔 옴암금광이 있었던 곳이라 토굴이 40여 개나 되는구만유. 요새 굴하나 파자면 8억이나 든다니께 젓보관은 우리 마을 빼고 워디서 허것시유. 보관료래야 한철에 드럼 한 개에 2천원씩이 수입으로 따져도 월매 안되지유.』
대를 이어 15년째 보관업을 하는 김경태씨(39)는 수맥이 있는 토굴에 보관한 젓은 볼그스레한 빛깔이니 더 없이 먹음직스럽다고 설명한다.
김장철을 앞두고 추석을 전후해 일기 시작하는 이 마을의 경기는 8월부터 도매상들이 줄을 잇고 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는 소매업이나 소비자들이 붐빈다.
최근들어선 서울이나 부산 등지로부터 공동구입을 위해 몰리는 주부들의 자가용 행렬도 전에 없던 독배새우젓 시장의 새 풍물이다.
『그런 것이 다 세상인심이 삭막해졌다는 징표여유. 서산이나 당진에서 추수햅쌀 지고 와서 새우젓하고 바꿔가던 일이 다반사고 새우젓도 인심좋게 꾹꾹 눌러줬는지 이자는 차비따지고 값따지는 도시사람들이 몰려드니께 그런 인심이 남겠시유?』
창고를 갖고 있는 허진호씨(48)는 세상인심이 변해서인지 전에는 장정 한 뼘에 3마리 밖에 못 올리던 새우도 크기가 작아져 10마리를 올려야 할 정도로 작아졌다고 비유한다.
찬날씨에도 숨을 마시던 염분 짙은 습기가 뱃속 깊이 찌르르 전해지는 독배마을.
오늘도 마을주민들은 다가온 김장용 젓갈을 각지에서 몰려든 트럭에 올려실으며 광천육젓 맛자랑에 하루해를 넘긴다. <광천=엄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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