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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 세계화필기행<5>|네덜란드서|튤립 철놓친 아쉬움 풍차 그리며 달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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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 풍차부터 찾았다. 운보는 네덜란드가 「풍차와 튤립의 나라」라는 선입감에서가 아니라, 「렘브란트」와 「고흐」가 즐겨 그렸던 그림소재로서의 풍차를 원하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김봉규 암스테르담 총영사는 이린 운보의 뜻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렘브란트」동상이 서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바로 커다란 풍차가 옆에서 돌고 있었다. 운하가 유유히 흐르고, 나무다리도 삐그덕거린다.
운보는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풍차를 그리면서 『풍차가 한대뿐이어서 그림도 외롭다』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김총영사는 『암스테르담에서 15㎞쯤 떨어진 곳에 「풍차마을」이 있으니 내일 안내해주겠다』면서 『한 달만 일찍 오셨어도 아름다운 튤립을 스케치할 수 있었을텐데요…』라고 말했다. 운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다 그림소재가 되는 건 아니지만, 꽃의 나라에 와서 꽃을 못 보는게 아쉽다』고 했다.
튤립은 흔히 네덜란드의 국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나라엔 국화가 없다. 다만 터키에서 수입한 꽃이 1633년께부터 널리 퍼져서 그것이 거국적인 투자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튤립이 한창 피었을때 (4∼5월)꽃은 곧 따버린다. 이는 구근을 캐기 위해서인데 튤립 구근은 수선이나 히아신스와 합께 네덜란드의 중요 수출품목으로 꼽힌다.
이튼날은 「풍차마을」에 갔다. 운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관광객과 현장학습 나온 소년·소녀들이 삥 둘러섰다. 이들은 붓으로 스케치하는걸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셔터를 눌렀더니 꼬마들은 어느새 고개를 카메라쪽으로 돌려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스케치를 마치고는 풍차집에 올라가 봤다. 풍차는 물을 퍼내는 역할이 주이지만, 나무도 자르고, 기름도 짜고, 염료도 잘게 빻고, 방아찧는데도 이용되었다.
옛날에는 건국에 6천개나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없어지고 관광용 2백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풍차와 도교는 네덜란드를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언뜻 보면 풍차는 하나의 멋인 것 같지만 이 나라는 밀물 때는 5분의2가, 썰물 매는 4분의1이 바다보다 낮은 지역이기 때문에 배수장치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근대화한 전동펌프로 대체되고 있어 관광용으로만 남아있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도교도 대부분이 전기로 움직이는 2단식장치의 것이고, 톱니바퀴를 사용하여 수동식으로 감는 것과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 사람이 직접 매달려서 열고 닫는 원시적인 것은 몇 개 안되었다. 이것 역시 관광객을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육지가 바다보다 낮기 때문에 운하가 많다. 전국이 1백개의 운하로 연결, 중요한 교통망을 이루고 있다. 운하를 잇는 다리만도 1천개가 넘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을 일컬어 물을 다스리는 천재라고 한다.
이 나라 속담에 『하느님은 바다를 만드시고, 네덜란드 사람은 육지를 만든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셀호를 찾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장장 30㎞의 대제방을 따라 가면서 거창한 담수호를 보았다. 대제방의 완성으로 물결 높던 조이데르바다는 바깥바다와 분리되어 아이셀호가 생겼고, 이 해역을 간척해서 얻은 새로운 육지는 폴더라 불리는 기름진 농목지대가 되었다.
우리는 이 제방에서 양털로 만든 기념품을 샀다.
암스테르담에 돌아와서는 스케치도할 겸 배를 타고 시가지를 돌아봤다. 암스테르담은 도로보다 운하가 발달된 곳이다. 그야말로 선을 그은 것처럼 시내 한복판을 꿰뚫고 흐른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휘하를 따라 느릅나무 가로수 길을 걸었다. 거리는 자건거를 탄 선남선녀로 꽉 차 있었다. 운하를 따라 둘러쳐진 철책에는 1천여대에 가까운 자전거가 줄지어 있다. 대부분이 열쇠를 채우지 않고 그냥 놓아두었다.
자전거 수가 인구의 반이 넘는다니 두 사람이 한대씩은 갖고 있는 셈이다.
자전거인구를 위해서 이 나라 정부는 자전거 길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핫팬티를 입고 꽃술을 목에 건 채 자전거경기를 하는 아가씨들에게 눈길을 주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암스테르담을 한바퀴 돌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집집마다 창가에 놓여있는 화분이었다. 어느 집에나 길쪽에 화분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이 나라사람들은 자기집 화분을 남이 보아주는걸 가장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암스테르담을 떠나기 전에 「렘브란트」집과 「고흐」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천재화가 「렘브란트」가 아내 「사스키아」와 함께 1639년부터 l658년까지 살던 집을 복원, 미술관으로 만든 「렘브란트」의 집엔 그의 손때가 묻은 미술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운보는 「렘브란트」의 컬렉션을 눈여겨보면서 자신의 민화수집에 비겨 『화가는 남의 좋은 작품도 많이 가지고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민속박물관을 가려고 하다 헤이그로 향했다.
이준열사가 묻혔던 묘지에 꽃 한 송이를 놓고 묵념을 했다.
1907년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곳도 가보았다. 이게 우리들의 자그마한 마음이기는 했지만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66㎞나 떨어진 헤이그를 다녀오면서 몇 번이고 빈속박물관보다 여기 오기를 잘했구나 생각했다. <이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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