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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우리 언어생활이요? ‘노답’ 수준은 아니에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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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한글날 특집의 하나로 오는 8일 개관 예정인 국립한글박물관을 찾은 한명준(왼쪽·서울 도성초 5)·최서윤(화성 예당초 6)학생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6학년 수연이는 엄마와 함께 음악방송을 보다 엑소가 나오자 흥분해 “헐! 심쿵! 심멎! 어떡해, 찬열이 완전 걸조야”라고 말했다. 엄마는 버럭 화를 내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그런 욕을 배웠어!”라고 야단을 쳤다. 수연이는 억울했다. 욕 아닌데, 찬열이가 너무 좋다는 표현인데, 어른들은 왜 우리가 쓰는 말을 모두 잘못됐다고 말할까? 우리가 쓰는 말이 엄마 말처럼 ‘세종대왕께서 지하에서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릴 만큼’ 나쁜 말일까?

10대 공감 퀴즈에 참여해 소년중앙 편집국 기자들에게 퀴즈를 낸 10대 대표들. 왼쪽부터 주제형(서울 동북초 6)ㆍ박주헌(서울 동북초 6)ㆍ조주연(수원 잠원초 5)ㆍ이서연(수원 잠원초 5)ㆍ정상철(성남 신백현초 5).

지난달 30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중앙일보 9층 대회의실에선 때아닌 10대 공감 퀴즈 대회가 열렸다. 10대들의 언어를 배워볼 요량으로 소년중앙 편집국 기자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주제형·정상철·조주연 학생기자 3명과 박주헌·이서연 독자 2명은 10대를 대표해 참석했다. 이들은 30대 중·후반으로 구성된 황정옥·이지은·김록환 기자팀에게 10대들이 주로 쓰는 단어 30개를 문제로 냈다.

“애인이 아닌 남자친구를 부르는 말이에요.”

“남친?”

“땡~”

황 기자의 점수는 20점.

“액세서리를 줄인 말은?”

“액서?”

“땡~”

이 기자의 점수는 40점.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에게 하는 말이에요. 할 말이 없어 답답할 때 이렇게 이야기해요.”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모르겠어.”

김 기자의 점수는 50점.

주제형(서울 동북초 6) 학생기자와 박주헌(서울 동북초 6)군이 김록환 기자에게 퀴즈를 내고 있다.

결과는 참혹했다. 기자 중 최연소로 100점을 확신했던 김 기자 조차 반타작을 했다. 주제형 학생기자는 “솔직히 두 개 정도 맞힐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쓰는 말을 생각보다 많이 알던데요”라며 의기소침해진 기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 기자는 “40점이나 받았지만 정답을 알아서 맞힌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설명을 듣고 추리한 결과”라고 말했다.

개취·평친·점약 같은 외계어가 난무하는 아이들의 문자 메시지를 본 부모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모든 단어가 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취’는 개인의 취향을 줄인 말이고 ‘평친’은 평생 친구라는 뜻이다. 그럼, ‘점약’은? 점심 약속의 줄임말이다. 이처럼 10대들이 만든 단어는 3억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어가 아니라, 대부분 문장을 줄인 말이다. 카카오톡·카카오스토리·라인 같은 통신 매체로 여러 명과 동시에 대화하는 10대들에겐 맞춤 단어인 셈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참신한 단어도 있다. 츄릅. 침을 삼키는 소리를 표현한 말로 좋아하는 것을 봤을 때 탐나는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트롤·캐리 같은 단어들은 게임 용어로 남자아이들이 주로 사용한다. ‘트롤’은 팀에 민폐를 끼치는 친구를, ‘캐리’는 팀에 도움이 되는 동료의 활약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은 사회규범보다 또래친구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최명기 청담 하버드 정신과 원장은 “청소년기는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변화가 많다. 반항심과 독립심이 강해져 또래들만 통하는 문화를 만들고 공유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양명희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조어나 유행어를 만드는 것은 과거·현재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를 이해하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젊은 선생님들이 학생과 소통하기 위해 아이들의 언어를 익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느끼면 사회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청소년 73.4%가 매일 욕을 사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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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10대들의 언어문화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일까. 강희숙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양명희 교수는 지난 2010년 서울·충남·전남 지역 초·중·고 청소년 1260명을 대상으로 ‘청소년 욕설 사용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73.4%의 청소년이 매일 욕을 사용했다. 욕을 시작한 시기는 58.2%로 초등 고학년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또 욕을 하는 이유로는 ‘습관이 돼서’가 25.7%, ‘남들이 사용하니까’ 18.2%,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와 ’친구끼리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해’가 16.7%로 같게 나왔다.

욕의 본래 의미에 가까운, ‘누군가를 무시하고 비웃기 위해서’라는 응답은 4.6%에 불과했다. 욕을 하는 이유에 대한 자세한 항목(그래프)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는 ‘남들이 사용하니까 따라한다’는 응답률이 29.6%로 가장 높다. 하지만 중학교로 넘어가면 16.7%, 고등학교가 되면 9.8%로 떨어진다. 이에 비해 ‘습관이 돼서 사용한다’는 응답률은 초등 12.6%에서 중등 29.4% 고등 33.4%로 점점 상승한다. 남들을 따라 하던 욕이 학년이 거듭될수록 습관이 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강용철 경희여중 국어교사는 “과거에는 장소와 대상에 따라 구별해서 욕을 사용했다. 하지만 요즘은 학교라는 욕 금지 구역에서도 무차별하게 욕을 사용한다. 무엇보다 친구를 부르는 호칭·감탄사·부사 등 생활 어휘에 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10대들도 ‘욕은 문제가 많다’며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주연 학생기자는 “어른에게도 욕을 쓰는 친구들이나 우리만 아는 은어를 어른들에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심하네’‘이래도 되나’ 싶어요”라고 말했다. 정상철 학생기자는 “힘을 과시하려고 일부러 욕을 쓰는 친구들이 있어요. 이상하게 그런 친구가 인기도 많죠. 오히려 바르고 고운 말만 사용하는 친구는 조용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에요”라고 설명했다.

욕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왜 사용하는지 물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욕을 안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박주헌군은 “하지 말라고 말하는데도 자꾸 장난을 치는 친구에게 욕을 하지 않는 건 정말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주 학생기자는 “그런 친구는 욕을 하지 않으면 절대 장난을 멈추지 않아요”라며 박군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정 학생기자는 “화가 났을 때 욕을 하면 시원한 기분이 들어서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10대도 바꾸고 싶은 욕 문화, 방법은 없을까

이서연(왼쪽)양이 김호원(중앙대 유럽문화학부 1) 멘토의 설명을 듣고 있다.

멘토로 참가한 김호원(중앙대 유럽문화학부 1)씨는 “학창 시절 제 언어습관은 한마디로 엉망이었어요. 힘이 세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욕을 사용했죠. 하지만 고등학생이 돼 책을 많이 읽으며 그동안 내가 사용한 단어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 깨달았어요. 그 후 입에 밴 습관을 고치기 위해 엄청 노력했죠”라고 말했다. 이서연양이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억양은 욕처럼 하되 욕을 대신해 아름다운 어휘를 사용했어요. 예를 들면, 엄마에게 꾸중을 들어 기분이 나쁜 날에는 “아 오늘 정말 기분이 꽃 같네”라고 말하는 거죠. 좋은 단어를 사용하면 화도 점점 사라져요. 친구와 싸울 때도 도움이 됐어요. 욕 대신 “강아지야!”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뭐야” 하더니 웃더라고요. 웃으면 싸움은 끝난 거죠.”

최 원장은 정말 화가 났을 때만 욕을 사용하라고 제안했다. “화가 나서 욕을 하는 건 괜찮지만 기쁘거나 슬플 때에도 욕을 사용하면 감정 전달에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모든 감정을 욕으로만 표현하면 어휘력과 표현력이 떨어져 대화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강 교사는 학교 교육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욕 사용을 자제시키는 교육보다 미국·독일의 경우처럼 의사 소통를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대화법을 배우면 자연스레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주 학생기자는 어른들의 언어사용에도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잘 못하는 선수에게 ‘그것도 못하냐 이 병×아’라고 화를 내는 어른들을 종종 봐요. 어른들은 10대들만 욕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진짜 욕은 어른들이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어른부터 모범을 보여주세요.”

글=황정옥 기자·김대원 인턴기자 , 사진=우상조 인턴기자

스피드 퀴즈 참여=주제형(서울 동북초 6)·조주연(수원 잠원초 5)·정상철(성남 신백현초 5) 학생기자, 독자 박주헌(서울 동북초 6)·이서연(수원 잠원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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