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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 되는 대한민국 아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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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정종훈
JTBC 국제부문 기자

“우리 딸, 오늘도 잘 잤어?” 어느덧 달처럼 불러온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내가 이야기한다. “무슨 소리야? 발로 힘껏 차는 걸 봐. 우리 몽실이(태명)는 분명히 아들이야.” 아내도 지지 않는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기분 좋은 실랑이다.

 그래, 나는 ‘딸바보’다. 아직 아기와 인사도 하지 못한 예비아빠가 어떻게 벌써 딸바보가 될 수 있느냐고?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다. 간절히 원하면 딸이 나와 줄 거다. 2남 중 장남인 나는 마음 따뜻한 누나나 귀여운 여동생이 있었으면 해서 어린 시절에도 애꿎은 부모님을 졸라댔었다.

 행복한 기대는 8개월째 접어들었다. 딸을 낳으면 미리 사 둔 미키마우스 원피스도 입혀 보고 싶고, 날 ‘무장해제’시키는 딸의 눈웃음과 함께 수다도 실컷 떨어 보고 싶다. 이번 주엔 부푼 마음을 안고 3D 초음파 사진까지 찍었건만 아기는 발과 손, 얼굴을 보여 줬을 뿐 정작 중요한 힌트는 꽁꽁 숨겼다.

 요즘엔 TV에서도, 내 주변에서도 나와 비슷한 남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젊은 아빠들이 그야말로 딸에게 푹 빠진 것 같다. ‘아빠 어디가’에 나오는 탤런트 정웅인의 딸은 특유의 재롱으로 인기를 독차지한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선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과 행동은 똑같지만 외모는 닮지 않은 사랑이가 시청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딸 사진을 날마다 업데이트하는 회사 선배의 SNS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바람은 더 간절해진다. 한 친구는 “딸이 ‘꼬마버스 타요’를 보면서 막춤 추는 걸 보면 절로 ‘아빠 미소’가 피어난다. 이런 딸을 거부할 수 있는 아빠가 어디 있겠느냐”고 자랑했다.

 물론 제사를 중시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처지에 장손으로서 책임감을 무시하기 어렵다. 부모님은 “손주가 딸이든 아들이든 조건 없이 대환영”이라고 하시지만 마음 한구석의 부담을 떨쳐내긴 힘들다. 친한 친구는 “솔직히 딸을 낳고 싶지만 매일 걱정을 끼고 살 것을 생각하면 아들이 나을 것 같다”고도 한다. 이 험한 세상에 밤늦기 전 딸이 집에 들어올지 걱정하느라 대낮부터 속이 탈 거라는 얘기다.

 생각해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선 남아 선호가 ‘대세’였고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구호가 유행했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지난해엔 남녀 출생성비가 105.3으로 통계 작성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 어르신들은 격세지감을 느낄 법하다.

 딸바보가 많아진 원인으로 다양한 분석이 쏟아진다. 어쩌면 치열한 경쟁 속에 지쳐 버린 요즘 아빠들에겐 딸이 건네는 살가운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 물론 ‘몽실이’가 남자이더라도 나는 최고의 사랑을 줄 거다. 다만 나처럼 무뚝뚝한 아들이 되지는 말아 줘.

정종훈 JTBC 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