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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쇠고기 자본주의 활용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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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년 전 광우병 발생으로 수입이 금지되면서 미국산 쇠고기의 재고가 크게 줄었다. 호주산 등이 계속 들어오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시장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한우값이 서서히 들먹이는 조짐을 보이면서 생산자인 축산농가와 소비자인 일반가계의 표정도 엇갈리고 있다. 대량 소비처인 주요 음식점들은 점점 값싼 식단을 짜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한우 암소만을 취급한다'던 어느 갈비집 주인이 수입 쇠고기를 쓰다 법정구속된 사건 이후 음식점들의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졌다. 요즘 갈비집 주인들 사이에는 한.미 쇠고기 협상이 주요 관심거리다. 미국산 쇠고기의 재고가 바닥나면 비싼 한우로 불고기나 갈비 요리를 내놓아야 하고 가격도 올려야 한다. 겨우 매출이 늘어날까 말까 하는 시점에 음식값을 올리면 손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가슴을 조이는 상황이다. 물가 당국이 수입 쇠고기의 재고를 계속 조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난달 서울과 도쿄(東京)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북핵 문제 못지않게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에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리고 한.일 두 나라로부터 똑같은 입장을 전달받았다. 미국 쇠고기의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산 쇠고기의 가장 큰 고객이다. 미 의회나 축산업계의 로비도 매우 세게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수입재개가 계속 미뤄지면 미국은 한.일 양국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까지 취할 수도 있다고 시사할 정도다.

이제 미국의 압력에 맞서 한.일 두 나라의 외교 교섭력이 관심의 대상이다. 양국은 국민건강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에서 광우병이 나타날 위험이 있는지를 면밀히 조사하겠다는 기본방침을 똑같이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다르다. 일본 정부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식품안전위원회가 쇠고기 수입 시기를 결정하게 된다. 이 조직은 정치 외교 및 통상조직의 영향권에서 배제된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게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총리가 식품안전위원을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으며 정치적 판단에 따른 신호를 보낼 수 있다. 교과서 왜곡사건 때마다 검정제도 절차상 일본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고 발뺌하는 것과 똑같은 피난처인 셈이다. 일본은 곳곳에 그런 방어진지 역할을 하는 위원회가 구축되어 있다. 한국엔 식품안전위원회조차 없다.

지난 15년 동안 미국의 쇠고기 자본주의는 미국 역대 대통령을 등에 업은 통상압력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번에도 한.일 양국 중 어느 나라가 먼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재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상대국의 협상력은 줄어들 것이다. 만약 한국이 일본의 수입재개 결정을 뒤따르게 된다면 우리의 카드는 정말 보잘것없는 빈 종이가 될 것이다. 일본도 했으니 우린들 별 수 없지 않으냐고 하면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통상마찰에서도 한국은 늘 그런 식으로 일본을 따라가기만 했다. 무사안일의 본보기다. 미국의 쇠고기 자본주의를 우리가 활용하는 뒷심이 없는 탓이다.

이제 한번쯤 발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쇠고기 수입을 재개할 거라면 줄 것은 주고 챙길 것은 챙기면서 '한.미 동맹'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하다간 미국엔 인심을 잃고 국내 쇠고기 생산자와 소비자들한테서는 욕이나 얻어먹는 우스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쇠고기에서부터 한국의 독자적 존재감을 보여줄 때다.

최철주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