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학생들이 원하는 건 질 좋은 교과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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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부가 엊그제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발표한 뒤 교과서 발행 방식을 놓고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2018년부터 고교에서 도입되는 통합사회(지리·일반사회·윤리·역사)와 통합과학(물리Ⅰ·화학Ⅰ·생명과학Ⅰ·지구과학Ⅰ), 고교 필수과목인 한국사 교과서를 정부가 주관하는 국정으로 발행할 것인지, 종전처럼 민간 출판사가 발행하고 정부가 검정할 것인지, 아니면 국정과 검정 방식을 혼용할 것인지가 쟁점이다. 어제 열린 교육부 주관 정책토론회는 보수와 진보 진영의 갈등 양상만 재연했을 뿐 별 소득 없이 끝났다고 한다. 문·이과 칸막이 교육을 없애겠다는 새 교육과정의 취지는 교과서 발행체제 논란에 밀려 실종된 상태다.

 우리 교과서가 좌편향 등 이념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국정으로 발행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가 발행하는 획일적 교과서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질식시킬 수 있어 검정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교과서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학자나 학회, 교사나 교사단체 등 교육 공급자의 관심사일 뿐이다. 학생이나 학부모 같은 교육소비자의 관심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이제는 우리도 외국처럼 질 좋은 교과서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중·고교 교과서를 접한 사람들은 분량은 물론 사진이나 그래픽 등이 풍부해 교과서 하나만 있으면 참고서가 필요 없겠다는 데 놀란다. 학계가 아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을 정하고, 토론을 통해 그 내용을 다듬는 과정이 수년씩 이어지는 데 대해서도 부러워한다. 이런 선진국 교과서에 비춰본 우리 교과서의 현실은 내용의 질과 양 모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질 좋은 교과서란 무엇보다 학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을 특정 학파나 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담은 것이다. 국정이냐 검정이냐를 떠나 우리의 현실은 좋은 교과서가 나오기엔 구조적으로 어렵게 돼 있다. 우선 우리 교과서의 발행 및 검정기간이 불과 1년여에 불과하다. 정부가 수시로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민간 출판사는 정부가 정한 일정과 가격 수준에 맞춰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교과서 개발기간이 짧은 데다 출판사는 교과서를 팔아 연구개발비를 뽑아야 하니 질 좋은 교과서가 나올 리 만무하다. 학계의 중진 학자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지 않고, 신진 학자들만 몰리는 건 사실상 방치된 교과서 제작 환경에 기인한다.

 결국 교과서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정부가 교과서 개발을 민간 출판사에 내맡긴 채 한 푼도 지원하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부터 개선돼야 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간판 학자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학자들이 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때 저서를 내거나 논문을 발표하는 것 이상의 업적을 인정해주는 풍토도 필요하다. 국정 또는 검정을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 하면 질 좋은 교과서가 나올 수 있게 할지의 생산적 논쟁으로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