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1004명 vs 프로 100명…차 없는 광화문서 반상 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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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프로 바둑기사 김민호(19) 초단과 서울 전농초등학교 2학년 김승구(8)군이 마주 앉았다. 승구군은 자세 한번 흐트러트림 없이 바둑판을 주시했다. 표정은 신중했지만, 바둑돌을 두는 작은 손에는 거침이 없었다. 한판 승부의 결과는 김 초단의 승리였다.

김 초단은 “승구군이 초반 좌상귀 싸움에 무리하게 뛰어들어 손해를 많이 봤지만 포석을 제대로 뒀다"며 "아직 어린데도 실력이 뛰어나 놀랐다”고 칭찬했다. 대국을 지켜본 김군의 아버지 김세일(42)씨는 “또래 아이들 중에선 꽤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데 이번에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21일 ‘2014 서울 차 없는 날’을 맞아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서 연 ‘별에서 온 바둑’ 행사의 한 장면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계속된 행사엔 남녀노소, 지역, 국적을 불문하고 1000여명의 바둑 애호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백미는 프로기사 100명이 1004명의 시민들과 바둑을 두는 ‘1004 다면기’ 였다. 1004라는 숫자는 기부 천사(天使)를 의미한다.

다면기(多面棋)는 한 명의 프로기사 또는 상수가 하급자 여럿과 동시에 대국하며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이 대국에서 시민이 승리하면 바둑계가, 프로기사가 승리하면 행사 후원사인 KB국민은행이 1만원씩을 적립했다. 이렇게 총 1004만원을 모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에너지 빈곤층을 위한 기부금으로 전달한다.

다면기 후에는 자유대국 및 초·중·고급 바둑강좌 등의 이벤트가 이어졌다. 특히 행사에 홍보대사로 참여한 프로바둑기사 이창호(39) 9단, 이세돌(31) 9단, 김효정(33) 2단의 사인회에는 시민들이 100m 넘게 줄을 섰다.

이세돌 9단은 “지난해에 비해 행사 규모도 커지고, 즐길 거리도 많아져 기쁘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행사에 참여한 주부 민정란(34)씨도 “7살 아이가 바둑을 배운지 5개월정도 됐는데,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을 갖고 놀때보다 가족간의 대화도 많아지고 차분해 진 것 같다"며 "이런 행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서 오전에 열린 행사 개회식에는 주최 측인 서울시의 박원순 시장과 공동주관한 한국기원의 홍석현 총재(중앙일보·jtbc 회장), 후원사인 KB국민은행 박지우 은행장 대행 등 내외빈 20여명과 일반 시민 100여명이 참석했다.

박 시장은 인사말을 통해“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다면기에 참여하는 건 세계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며 "적극적 참여에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홍 총재는 " 한류(韓流)의 일각을 이루는 바둑으로 서울 한복판을 수놓는 장면은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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